@ 이 시편은
교리적으로, 환란 때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에서(레위기
1:4, 8) 문자 그대로 제물로
바쳐지는(요한계시록 6:9) 이스라엘인들을
먹을(4절) “잔인한 짐승”들을(베드로후서
2:12) 겨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3절’을 일반적인
사람의 타락상에 적용하지만(로마서 3:12),『자기 백성을 사로잡힘에서』(6절)는 개인적인 구원이라는 바울 서신의 교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1절.〕어째서 그는 그렇게 말했을까요? 어째서
그는『자기
마음』속에
그렇게 말했을까요?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어리석은 자』일까요?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오십 군데 대학의 교수진과 간부들
중에는 어리석은 자가 얼마나 많이 있는 것일까요? 또다시
단수와 복수가 섞여있음을 주목하십시오(비히못/욥기 40:15). 어리석은 자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할지라도『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근본적인
본성이 썩어있으므로, 결국 선을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죄악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2절.〕깨닫는 사람이라면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
또 하나님의 길과 행하신 일들을 지켜보고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3절〕은 다니엘의 칠십 째 주 후반부에 진행되는
일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노아 당시나 아브라함 당시나
교회 시대를 언급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환란
시대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4절.〕지식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부르지
않겠습니까? 지식이 있는 사람이 문자 그대로 인간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5절〕은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우상들과 신들을 두려워하는 대중들을 보여주며(열왕기하
17:7┃출애굽기 23:24), 그 다음 우리는
그 구절의 중간에서, 환란 기간 동안 “임의로 행동하”는(다니엘 11:28) 자들과 함께 뒤엉켜버린
적그리스도의 군대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5절’의 승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므로 남은
자들이 ‘6절’에서 여전히
재림을 위해 기도합니다. 환란 때의 구원은
갈보리가 아니라『시온에서』나옵니다(시편 14:7/50:2┃요엘 2:1/3:16). 크롤과
더멜로우, 레인지, 클라크, 엘리콧, 예이츠, 모티어, 헹스텐베르그는
이 시편 전체를 과거에 갖다 놓고, 자기들이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영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1절’이 사실이라면
유럽, 미국, 러시아에 적어도 천만 명의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그것을
자기『마음』속에 말했음을 주목하십시오.
어리석은 자도 그 머리는 창조주가 존재해야 하며(그렇지
않으면 이 우주가 우연하게 설계된 것입니다), 나중에 심판자가
있어야 한다고(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말해줄 것입니다. 또다시『어리석은 자』(단수)를 언급하던
중에 놀랍게도 복수가 나오는 것을(『그들은 부패하고』) 주목하십시오(비히못이
여기 있습니다!). 불신(不信)은 90%의 ‘마음’과 10%의 ‘머리’입니다(잠언 18:1∼3 주석 참조).
이 문맥에서『선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도다.』는 한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곧 자기 신념을 고백하는
무신론자들입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본성이 썩어 있으므로,
그들은 어떤 진정한 선도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죄악을
이루어내고 맙니다(4절).
‘2절’에서
우리는 “깨닫는
사람”이라면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 또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밤낮으로
지켜보고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찾을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5절’에서 겁에 질린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겁에 질리게 된
것입니다(4절). 사람이 사랑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으로 그 사람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렇습니다. 땅 위에 있는 어떤 사람도
그가 고백하고, 견디고, 지지하고, 만들고, 벌고, 자격을
갖추고, 생각되고, 말하고, 쓰는 것대로가 아닙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대로입니다. 지혜는
간단히 말해서 언제 두려워해야 하고 언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잠언 9:10a),『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나...』(잠언 29:25a).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배교한
겁쟁이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대로이며, 이 땅에 거하는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도는 군중을 두려워했고(마태복음 27:24), 아합은 엘리야를
두려워했고(열왕기상 21:27), 헤롯은 조롱을
두려워했고(마태복음 14:9), 이스라엘은 결코
신들이 아닌 신들을 두려워했습니다(열왕기하 17:7). 유다는 돈을 사랑했고(요한복음
12:6), 게하시도 돈을
사랑했습니다(열왕기하 5:20). 아합은 재산을
사랑했고(열왕기상 21:6),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영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사랑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서
말입니다(사도행전 5:1∼4). “죄의 사람”은 권세와 경배받는 것을 사랑할
것입니다(다니엘 11:36∼38┃데살로니가후서 2:3). 그리스도인
교육자가 사람들의 혼보다 재산과 건물을 더 사랑하면,
그는 육신적인 사람이며 세상적인 어리석은 자입니다. 성경
교사가 자기 동료들의 비평을 두려워하고 “위대한 학자”라는 자신의 평판을 사랑하면,
그는 타락하여 버림받은 자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대로입니다.『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그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으니』(5절). ‘레위기 26:17’을 보십시오.
어떤 흑인이 어느 날 밤, 자기 집에 “지름길”로 가려고 한 묘지를
통과해 갔습니다. 한 유령이 그의 뒤를 쫓았고, 그는 그
묘지에서 빠져나가려고 부리나케 달렸습니다. 그러는 중에
그는 세 번이나 땅에 엎어지고, 비석에 걸려 넘어지고,
벽돌담에 세게 부딪혔으며, 그 담을 넘어가다가 손과 무릎이
다 까지고, 시멘트로 된 반대편 길바닥에 떨어져서, 결국
절뚝거리며 집에 도달했습니다. 다음날 한 친구가 그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했던 사건에 대해, “원, 이런 사람을 보게. 자네는 유령이
아무도 해칠 수 없다는 걸 모르나?”라고 하자, 그 생존자는 말했습니다.
“알지,
잘 알고말고. 하지만 그게 말이야,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해치게 만들어!”
‘6절’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왔더라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로잡힘에서
데려오실 때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6절).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내 얼굴을 두리니 그러면 너희는 너희 원수들 앞에서 죽임을
당하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이 너희를 다스릴 것이요,
너희는 너희를 쫓는 자가 없는데도 도망하리라.』 (레위기 2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