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7∼21)
『 17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게 하려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보내셨노라. 말의 지혜로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되기를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명철을 없애리라.”하였느니라.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학자가 어디 있느냐?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의 어리석음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 』
최근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과학과 철학, 그리고 모든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들과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으며, 과학과 철학을 이해하는 데도 실패했기에 발생한 결과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에는 역설적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기독교의 참다운 힘은 타락한 인간들의 방식들에 대해
“동의”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서 “혐오”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자체의 모순들에서 드러납니다. 교회의 증거는 진리를 설명하기보다
진리를 선포할 때 더욱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성이 아닌
믿음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증명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어떠한 믿음도 필요없습니다. 믿음은 실험이나 논리의 실증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십자가는 자연인과
정반대에 놓여 있습니다. 십자가는 거듭나지 않은 마음과는 반대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와 타락한 인간의
이성 사이에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것과
같으며, 굳이 그렇게 하겠다고 고집한다면 결국 불공평한 논리와 의미
없는 십자가와 힘을 잃은 기독교만 남게 될 뿐입니다.
여기서 전반적인 문제에 대한 이론적인 논의를 접어 두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으로 옮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고찰해 봄으로써 그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모순들을 고찰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은 죽었다고 믿고 있으나
전보다 더욱 더 살아 있으며, 영원히 살기를 온전히 기대합니다. 그는
이 땅 위에서 걷고 있으나 동시에 하늘에 앉아 있으며,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회심한 이후에는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더 이상 집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독수리처럼 창공에 있는 것은 은혜와 아름다움의 진수이나 땅
위의 것은 보기 흉하고 추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천상에서 최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바로 이 세상의 삶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곧바로 배우게 되는 것은 그가 이 세상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그는 인류의
공통된 양식을 다르지 않고 반대의 것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하면 그는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잃어야만 합니다. 만약 그가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시도하면 그는 그것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는 올라가기 위해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만약 그가 내려가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벌써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내려가기
시작할 때 그는 올라가는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며, 가장 강할 때 가장
약합니다. 그는 비록 가난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유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을
풍요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사라집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였을 때 가장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을 때 가장 적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낮다고 느낄 때 가장 높으며, 죄에 대하여
가장 민감할 때 가장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고
알고 있을 때 가장 현명하며, 그가 가장 위대한 지식을 얻었다고 할
때 가장 적게 알고 있습니다. 그는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가장
많은 것을 하며, 가만히 멈추어 서 있을 때 가장 멀리 가고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그는 즐거움을 유지하며, 슬픔 가운데서조차도 그의 마음은
기쁨을 간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역설적인
성품은 끊임없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그는 자신이 지금 구원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래의 구원(몸의 구속)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조건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는 압도되고
스스로가 완전치 못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보다 그가 더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육신에는 어떤 선한 것도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통스러울 만큼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을 가장 사랑합니다. 그리고 비록 자신은 가엾고
비천할지라도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군의 주가 되시는 그분과 친밀하게
대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있어 조금도 부당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가 전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의심 없이 믿는 바는 자신이 하나님의 눈에 보석과 같으며, 자신을 위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고, 치욕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이며 그 거룩한 시민으로써 첫
번째 의무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존 낙스’(John
Knoxㆍ1510∼1572)가 “오
하나님, 제게 스코틀랜드를 주시지 않으면 저는 죽겠습니다.”라고 기도한 것과 같은 강렬한
헌신으로 이 세상에서 자신이 속한 나라를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들뜬 마음으로 위에 있는 영광스런 나라로
들어가기를 오래 전부터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해 전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하늘 아버지의 부르심을 매우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비판적인 불신자들은 이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매우 쉽고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인은 확실한 비관론자이면서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낙관론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는 비관론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십자가에서 영광의 주님께
내려진 심판이 모든 자연과 모든 세상 사람들을 동일하게 정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밖의 모든 인간적인
희망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고귀한 노력이라도 단지 먼지
위에 먼지를 쌓는 것과 같은 것임을 그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조용하고 평안한 낙관론자입니다. 십자가가 세상을 정죄하였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전 우주에 걸쳐 선(善)의 최후의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침내 모든 것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성취를 기다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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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No. 80/199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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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주 날개 밑 즐겁도다∼♪∼♬
1. 주 날개 밑 내가 편히 거하네 밤이 어둡고
큰 바람 부나∼♪
아버지께서 날 지킬 줄 아니
겁내지 않고 잘 쉬리로다∼
2.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되니 그 안에 쉬기를
원하노라∼
이 세상 내 슬픔 위로 못하나
주님이 안위와 복 주시네∼♬
3. 주 날개 밑 귀한 희락이 있네 생전에 걱정
다 지나도록∼♩
거기서 숨어 돌보심을 받고
예수께 쉬어 든든합니다∼
【후 렴】
주 날개 밑 즐겁도다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토록
거하겠∼네∼♩∼♪♬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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