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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1ㆍActs 1:11) 말하기를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바로 이 예수는 너희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더라. Which also said, Ye men of Galilee, why stand ye gazing up into heaven? this same Jesus, which is taken up from you into heaven, shall so come in like manner as ye have seen him go into heaven.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주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재물에 대해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음의 설명은 이것을 매우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분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존중하고 다른 쪽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 Ye cannot serve God and mammon』(마태복음 6:24). 이 문맥에서 재물은 물질적 필요에 마음을 쏟는 것을 말하는 듯합니다. 그분은 항상 그렇듯이 물질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리 모두가 겪는 내적 투쟁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다람쥐들은 자기들의 우리를 장식하고 있는 바퀴 굴리기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정말 즐기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그 바퀴는, 결코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다는 맥풀리는 느낌을 갖고 일상 생활 속에서 끝없이 투쟁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서구 사회에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노력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좀더 많은 돈을 벌면 자유로워지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낫고 멋진 상품들이 항상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에 우리는 버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쓰게 됩니다. 놀랍게도, 인간은 자신이 받고 있는 연봉이 1억 원인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목표는 3천만 원이나 4천만 원을 더 벌어야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목표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그가 전진할 때마다 점점 뒤로 물러섭니다. 사람은 2억 원을 벌면서도 자신의 혼이 예속되어 있다는 쓰라림을 맛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많이 번다면 예속된 것 같은 느낌은 받지 않을텐데...” 그러고는 계속해서 어떻게 시간을 자유롭게 쓰면서 돌아다닐 것인지를 말할 것입니다. 자유란 당신이 가진 것에 대해 내적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하늘의 보물만을 갈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태도는 당신이 심리적으로 자유롭게 느끼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의 시야를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에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새로운 방법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래서 당신이 ─ 이를테면 ─ 지금과 같이 긴 시간 동안 일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직접 관여하는데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제 당신은 왜 주 예수님이 인간이 정확하게 어떤 소유물을 가져야 하는 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 간에 결정해야 할 필요성에 더 집중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의 반대편에 서는 결정은 이렇게 말하는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잠시 있을 뿐이야. 내게 필요한 것은 그저 나 자신과 부양 가족들이 생존하기 위한 것뿐이야. 만일 하나님께서 그 이상을 주신다면(그리고 그분은 매우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이시지) 나는 그분이 공급하시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어. 하지만 그것을 추구하거나 내가 실제로 필요한 것 이상을 얻으려고 자신을 종으로 만들지는 않겠어. 나의 진짜 보물은 하늘에 있거든.”
저는 제 마음속에서 ‘실제적인,’ ‘현실적인,’ ‘균형 감각,’ ‘책임감’ 등에 대해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끝없는 합창은 이 땅에서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심지어 정의를 내려 보라는 말을 들을 때마저도(“당신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분량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단지 육체와 혼을 함께 유지할 수 있는 정도면 된다고 보는가? 아니면 건강과 교육 등도 필요하다고 보는가?” 등) 저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그런 류의 정의에 지배되면 우리는 서서히 ‘지금 여기에’ 매혹될 것입니다. 일단 우리의 우선 순위가 명료하게 되면 필요와 같은 것들은 저절로 규정됩니다.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필요한 것이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똑같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상반되는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까 하는 것이지 털이 얼만큼 많이 모여야 턱수염이 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 하늘에 쌓아 두는 보물 하지만 하늘에 있는 보물을 논하지 않고 이 문제 전체를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보물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이미 고백한 바 있습니다. 분명 그것은 내세에 우리에게 귀중합니다. 똑같이 분명한 것은 그것은 지상의 투자와 달리 우리에게 불안을 야기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마태복음 6:19, 20). 유가 증권(유가 증권을 뜻하는 영어 단어 ‘Securities’는 ‘안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은 그 이름과는 달리 안전하지 못합니다. 은행과 보험회사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귀금속들은 모두 도난당해 왔습니다. 이 지상에는 안전한 투자란 없습니다. 심지어 ‘어느 정도’ 안전한 투자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보물은 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증받습니다. 그것은 귀중합니다. 그것은 안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하찮게 생각합니까! 하늘에 보물을 쌓아 놓기 위해서는 지상의 시간 ─ 자동차와 TV, 신상품을 사기 위해 바쳤을 수도 있었던 시간 ─ 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전체 요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에너지를 분배하는 방식은 바로 우리의 관점이 어디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과거에 로마 카톨릭교도들이 이 세상 돈으로 하늘의 은혜를 사려고 했던 것처럼, 복음주의자들은 선교회에 헌금하는 것으로 하늘의 보물을 사려 합니다. 돈으로 하늘의 보물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 환율은 ‘0’ 입니다. 이 세상의 보상을 얻기 위해서 노동을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보물을 얻기 위해서도 노동을 해야 합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후자의 노동은 기쁨과 즐거움인 반면 전자의 노동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그 보물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전혀 말해 주지 않습니다. 비유에서 신실한 청지기는 나중에 다스리게 됩니다. 바울의 명백한 가르침은 “우리가 참으면 우리도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요...”(디모데후서 2:12)라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보상은 ‘보물’과 동일한 것일까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갖가지 보물이 저마다 사람들에게 달리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살펴보면 재미있습니다. 진주ㆍ다이아몬드ㆍ황금 등은 해적 행위, 도둑질, 살인, 강도, 근심, 탐욕, 잔인함, 고문 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은 인간 속에 있는 불건전한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만일 많은 주석가들이 제안하듯이 ‘보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하는 능력이라면 어떠할 것인가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아름다움을 알려는 열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수천만 원을 버는 행운과는 매우 다른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 검토하며 사는 삶 당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십시오. 거울 속에 나타난 인물에게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나의 보물은 어디 있는가? 나의 마음은 어디 있는가? 나의 진정한 야망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내 육체가 태어난 나라의 자녀일 뿐인가, 아니면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기도 한 ‘순종ㆍ잡종’인가?”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십시오. 당신이 보게 될 눈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 눈은 당신에게 진리를 말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로워지려면 당신은 진리에 직면해야 합니다. 당신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먼저 당신은 자신에게 채워져 있는 사슬을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 혼은 우리 혼이 붙잡고 있는 것에 붙잡혀 있다. 금사슬에 매여도 노예는 노예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것은 생명이건 토지건 우리의 오른쪽 눈이나 오른손처럼 귀중히 여기는 모든 것은 우리를 얽어매는 사슬. ─ Arthur S. Booth Clibborn,「There Is No Gain」
그렇다면 그 매인 사슬을 끊고 주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애쓰십시오. 그분께 당신을 위해 그것들을 깨뜨려 달라고 청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그것들을 집어들어서 영원한 불 속에 던져 버리십시오. 보이지 않는 수많은 방관자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나는 하늘의 시민이다. 나는 한 분 주님을 모시고 있으며, 오직 그분만을 섬길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가 다음과 같이 표현한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사슬은 벗어지고 내 마음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나는 일어나 나아가 당신을 따랐습니다. ─ “And Can It Be”, words by Charles Wesley.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의 보물을 위해 어떻게 수고합니까? 그 주제는 복음서에서 비유와 주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되풀이되어 나타납니다. 두 가지 개념이 가장 중요한 듯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특정한 잠재력(시간, 기회, 능력 등)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으로 무엇인가를 그분께 돌려드려야 할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이와 관련된 개념은 우리가 잠재력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지에 따라 보상 또는 보물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일단 우선 순위를 선별하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시간을 자유롭게 내는 일이 가능함을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름에는 몇 달 동안 기독교 캠프를 돕고 겨울에 벌어들인 수입으로 살아가는 어떤 보험 사원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와 비슷한 계획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은 세속적이고, 기독교 캠프만이 ‘참된 기독교적 봉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돈에 우선권을 덜 둔다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발견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잠재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시간, 돈, 신체, 타고난 은사, 영적 능력 면에서 무엇을 주셨습니까?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떤 식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당신은 어느 정도까지 그 잠재력들을 사용해 왔습니까? 당신은 오늘 그것을 조금이라도 사용했습니까? 이번 주에는? 지난 달에는? 한 해를 되돌아볼 때 당신은 어느 정도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 왔습니까? 만일 양심이 당신을 괴롭힌다면 당신은 얼마나 빨리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까? 공부를 모두 마친 후에? 다른 직업을 갖게 될 때? 결혼하고 나서? 바로 지금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11 그때 이 모든 것이 녹아 버리리니 너희가 모든 거룩한 행실과 경건에 있어 어떠한 사람들이 되어야겠느냐? 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열망하라. 그때는 하늘들이 불에 타서 녹아 버리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도 맹렬한 불에 녹아내릴 것이나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런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점 없고 흠 없이 평강 가운데서 그분께 발견되도록 힘쓰라.(베드로후서 3:8∼14)
“ 강건하고 담대하라. 무서워 말고 낙심치 말라 ” (여호수아 1:9).
─────────────────────────── 존 화이트/『 헌신의 기쁨ː(제3장) 』... ───────────────────────────
『 너희는 예루살렘의 거리를 여기저기 달려서 이제 보고 알며, 거기 넓은 곳에서 찾으라. 만일 너희가 한 사람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가 그 성읍을 용서하리라. 』
(예레미야 5:1)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내 양들을 치라.”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내 양들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Follow me.”
MAGNIFICENT OBSESSION by John White
Originally published by InterVarsity Press as Magnificent Obsession by John White ⓒ 1990 by John White 〈This is the expanded and revised edition of The Cost of Commitment ⓒ 1976 by I.V.C.F. of the USA〉 Translated by permission of InterVarsity Press P.O. Box 1400, Downers Grove, IL. 60515, USA All rights reserved.
Korean Edition ⓒ 1998 by Korean InterVarsity Press C. P. O. Box 1960,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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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19) 피조물이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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