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하는 정을기 목사의 주장 가운데 우선 몇 가지를 제시한다면 첫째, 오늘날 원본과 같은 권위 있는 성경은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필사본들이 남아 있지만 원본처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고, 셋째는 학자들이 원문비평을 통해서 만든 성경이 신앙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정목사의 주장과 다른 비평가들의 견해를 먼저 확인하고 순차적으로 평가해 보고자 한다. [다음에 제시되는 "정을기 #1,2,3" 등과 같은 표현은 본 논의의 정리를 위한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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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기 #1] 아마 많은 사람들이 놀라겠지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현재 우리에게는 신약 성경 원본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을기 #2]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약 5,400개에 이르는 부분적 혹은 전체적인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 필사본들(손으로 기록한 성경 사본)과 라틴어, 꼽트어, 시리아어 등으로 번역된 약 8,000개에 이르는 번역본들 그리고 교부들(당시 목회자들)의 글에 인용된 성경 구절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본들 중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본은 하나도 없으며 서로 일치하지 않는 본문은 약 300,000개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정을기 #3] 사본들을 서로 비교, 분석하고 면밀히 검토해서 원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을 만들어 내는 작업인 본문 비평은 필연적이며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성경 본문이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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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환 #1] 신약 성경 원본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으며(구약의 경우도 같다), [박창환 #2] 사본만 해도 5,500여 개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도 같지 않다... 동시에 성경의 같은 부분을 담은 사본들끼리도,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고, 꼭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5,500여 개의 사본이 하나도 같지 않고 다 다른데, 그리고 텍스투스 리셉투스도 역시 그 중의 하나인데, 어떻게 그들의 논리가 성립되는 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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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카슨 #1] 우리는 자필 원본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D.A. 카슨 #2] 또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풍부한 사본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단 두개의 사본이라도 세밀한 부분까지 일치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본들은 다 손으로 필사되었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본문 형태 안에서도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두 개의 사본은 존재하지 않는다.3)
이와 같이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는 비평가들은 그리스도인이 권위를 둘 수 있는 성경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원본은 없고 필사본만이 있는데, 그것도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면 도대체 성경은 어디에 있으며,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지하거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이들에게 속아 성경에 대한 믿음이 파괴되며 결국 성경에 권위를 두지 못하고 목사나 학자들의 인간적인 권위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 파괴적 비평가들은 어떻게 똑같은 주장을 하고 같은 생각을 공유하겠는가? 그들 모두는 성경에 대한 불신을 갖도록 교육받았으며,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들에게도 소위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배제한" 고등교육의 산물이다. 문제는 그들이 비성경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문제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독자들은 과연 정목사의 말에 얼마나 놀랐는가? 현재 우리에게는 신약성경 원본이 없다는 사실이 과연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최초의 신약 성경 원본은 필사본으로 대체될 수 없는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원본성경은 완전하고 권위가 있지만 원본이 없어진 지금은 그런 절대적인 성경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말이 놀라운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성경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신약성경 원본이 없다면 성경이 없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원본을 없애시는 데 대해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필사본들과 번역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해 오고 계심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예레미야 36장에는,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여호야킴 왕 앞으로 옮겨와 예후디가 그 두루마리를 읽고 있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렘 36:21). 그런데 23절에 따르면 예후디가 서너장을 읽고서 그것을 손칼로 잘라서 "화덕"에 던져 두루마리를 태워 버린다. 최초의 원본이 없어진 것이다.4) 그러나 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처음에 두루마리에 있었던 이전의 모든 말씀들을 다른 두루마리에 다시 기록하게 하셨으며, 그렇게 해서 두 번째의 원본이 생겨나게 되었다(렘 36:32). 따라서 화덕에 던져졌던 두루마리의 본문(렘 41-51장)이 다시 기록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또 한번 발생했다. 예레미야 51:59-64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바빌론에 가서 그 두루마리를 읽고 그것을 돌에 묶어 유프라테스강에 던지라고 했다. 결국 두 번째 원본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성경에는 예레미야 45장부터 51장이 기록되어 있다. 그 출처가 어디겠는가? 바로 두 번째 원본의 필사본에서 온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세 번째 원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키신 필사본은 말씀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최초의 원본 자체를 지키시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누구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원본은 필사되었고 그대로 전수되었다.5)그런데 왜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본에 대해 가치를 두신 것보다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두어야 하겠는가? 그러나 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에 호소해서 성경 필사본에 대한 믿음을 파괴한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학자들의 말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는다. 이것이 성경을 믿지 않는 학자들과 다른 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5:18).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 21:33). [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꼭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음이라. 이것이 너희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이러한 성경적인 믿음으로 필사본들의 전승과 보존의 역사를 연구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말씀들의 단어 하나 하나를 지켜오셨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섭리적 손길과 증거는 결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는, 신약성경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본에서 필사본으로 권위를 옮겨 오신 것을 의미한다.
정목사의 필사본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 대한 믿음을 한 단계 더 파괴하는 것이다.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현재 5,400개의 필사본들이 있다고 밝히면서 그는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본들 중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본은 하나도 없으며 서로 일치하지 않는 본문은 약 300,000개에 이른다는 사실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정목사의 처음 말에 놀란 사람들은 그래도 필사본들이 많으니 괜찮겠지 했으나 이내 "안타까워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5,400개의 필사본들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서로 일치하지 않는 본문이 30만개나 되기 때문에 원본과 같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성경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세뇌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목사나 박창환, 카슨 등과 같은 비평가들과 그 외 대부분의 파괴적 비평가들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는 성경 변개자인 알란드의 책을 자주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그들 스스로 알란드를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란드의 책을 좀더 차근하게 읽고 이해했다면 정목사나 다른 비평가들은 그들의 거짓된 주장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알란드 역시 원본과 필사본들에 대해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똑같다. 단지 이 논제와 관련하여 그의 연구자료가 정목사를 비롯한 비평가들의 주장을 거짓으로 판명하는 한 근거가 되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알란드는 정목사와 다른 비평가들과는 다르게 이렇게 밝힌다.
"뮌스터[신약원문연구소]에는 각 필사본들이 모든 다른 필사본들과 완전히 세부적으로 비교되는 완전한 컴퓨터 출력정보가 있다. (필사본들 가운데 자주 100% 일치하는 필사본들이 있는) 비잔틴 원문의 특성을 나타내는 고도의 균일성을 고려하여 앞에서 제시한 몇 권의 책들[Text und Textwert...]에서처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66개의 필사본들만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한했는데, 이 제한된 인용으로는 불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24권 한 세트로 구성된 광범위한 그 책들은 누구에게나 활용가능하기 때문에 이 본문의 가치 평가 도구를 통한 원문비평가들의 새로운 발견을 기대한다."6)
알란드는 필사본들 가운데 "100% 일치하는" 경우를 자주 확인했다고 밝혔는데, 이것은 다른 필사본 계열(유형)에서 발견할 수 없는 비잔틴 원문만의 특성이다. 100%의 일치는 인쇄된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옮겨쓴 필사본들에서 발견되는 증거이다. 100% 일치되는 필사본이란 결코 동일한 시간에 한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필사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헬라어 신약성경은 140,521 단어들로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들 하나하나를 현재의 헬라어 성경으로 보존하신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는 성경 말씀을 믿기 때문이며, 둘째는 필사본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 구절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야고보서 1:22 말씀은 [그러나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단순히 듣기만 하는 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다음과 같은 필사본 증거들에 의해 확증된다.("표 1" 참조)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87년 현재 이 구절의 본문에 대한 증거 자료로 제시된 필사본들은 전체 5,400여 개의 필사본들 가운데 556개이다. 이 가운데 473개의 피사본은 <표 1>의 (1)의 본문을 기록하고 있으며, 23개의 필사본은 (2)의 본문으로, 6개의 필사본은 (3)의 본문으로, 1개의 필사본은 (4)의 본문으로, 또 1개의 필사본은 (5)의 본문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2개의 필사본은 필사본상에서 읽을 수 없는 상태로 훼손되어 있기에 어떤 본문인가를 확인할 수 없으며(6), 4개의 필사본은 마이크로 필름으로 필사본을 촬영했으나 필름이 손상을 입어 현재 확인이 안되는 경우이고(7), 46개의 필사본은 야고보서 1장을 담고 있으나 1:22에 결함이 있는 것, 즉 탈락(삭제)된 것이다(8).7) 결과적으로 이 구절을 실제로 기록하고 있는 전체 필사본 504개 가운데 473개인 93.8%의 필사본들과 이 구절의 증거자료로 제시되는 전체 필사본 556개 가운데 473개인 85.1%의 필사본은 동일하게 "한 가지 본문"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사실은 이 필사본들이 하나의 모본을 놓고서 한 지역이나 장소에서 473명이 동시에 필사하거나, 한 사람이나 몇 명이 한 모본을 놓고 473개를 동시에 필사했던 것이 아니라, A.D.2세기부터 16세기까지 수세기를 거쳐 서로 다른 대륙의 다른 지역, 다른 사람들에게서 다른 모본(母本)들을 근거로 필사된 필사본인데도 동일하게 한 가지 본문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다른 시대, 다른 지역, 다른 사람들을 통해 기록되었어도 한분 성령 하나님을 통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서로 모순이 없고 완전한 것처럼 이 구절의 필사본들 역시 1600여 년 동안 서로 다른 지역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필사되었어도 "한 가지" 본문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보존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높은 비율로 "한 가지 성경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몇 구절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전체 신약성경의 어떤 구절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구절에 대해서든지 전체 필사본 5,400여 개가 모두 100% 일치하지 않는 것은 사탄이 말씀을 훼손하기 위해 여러 형태로 역사했기 때문이다. 성경 보존은 사람들을 통해 사탄이 역사하여 성경 본문을 변개시키는 행위 자체를 막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행위가 있었고(창 3장),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도 성경 변개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있었다(신 4:2, 잠 30:5-6, 렘 23:30,36, 고후 2:17, 계 22:18,19). 성경을 변개시키는 공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는 것이 바로 성경의 보존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비뚤어지고 완악한 자들에게 거짓된 것을 믿게 하신다(살후 2:11-12). 그것은 그들이 거짓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100%의 일치가 아니라 많은 이본(異本 )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약 30만 개의 다른 본문들이 발생하는 것은 필사본 자체가 담고 있는 책이나 분량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드러나는 결과이다. 즉 어떤 필사본은 몇 구절이나 몇 장들 일부분만을 기록하고 있으며, 어떤 필사본은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계시록 등의 분류에 따라 여러 책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필사본에는 필사자의 비의도적인 필사상의 오류들과 성경을 변개시키는 사람들의 의도적인 변경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30만 개의 서로 다른 본문이라는 것은 위의 야고보서 1:22의 예에서처럼 (1),(2),(3),(4),(5)의 경우와 같이 한 구절에 5개의 다른 본문이 등장하는데, 신약성경 전체 구절들에서 각 구절에 이러한 다른 본문의 표현이 발견되는 것을 전부 합쳤을 경우를 추정한 수가 30만이다. (학자들에 따라서 50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수가 많지만 그 내용을 보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은 늘 "한 가지 본문"을 담고 있다. 4개의 다른 본문들은 바른 하나의 본문에 대한 증거가 확고하기 때문에 성경 보존에 어떤 손상도 가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헛된 수치를 가지고 정목사와 파괴적 비평가들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 무지한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증거로서 신뢰성이 없는 헛된 숫자는 바른 성경 본문을 보존하는데 영향을 줄 수 없다.
원본이 없고, 필사본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 상태에서 "본문 비평은 필연적이며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작업을 통해서 만들어진 성경 본문이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라는 정목사의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믿음이나 확신도 줄 수 없다. 정목사는 연약하고 무지한 사람들의 믿음을 뿌리까지 뽑아 원문비평의 열기로 바싹 건조시켜 이미 "예후디의 화덕"(렘 36:23)에 던져 불태워버린 상태이다. 그런데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필사본들과 30만 개의 다른 본문들을 가지고 "서로 비교 분석하고 면밀히 검토해서 원문에 가까운 본문을 만들어 내는" 원문 비평의 결과를 신뢰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대의 파괴적 원문비평 역사는 약 200년 정도밖에 안되었다. 또한 5,400개의 필사본들이 거론된 것은 채 50년도 안된다. 지금도 파괴적인 원문비평 작업이 비평가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지만 그들은 과거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되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성경이 있었다고 믿지 않으며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의 원문비평 작업을 믿으라는 것인가? 다만 이미 속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하고 맹목적인 성경에 대한 믿음을 소위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한 단계 격상시켜준(사실은 파괴한) 비평가들을 신뢰하게 될 뿐이다. 파괴적인 성경 비평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인간적,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성경을 믿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평범한 믿음, 바로 동일한 한 가지 믿음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성경"만을 쓰셨다는 믿음이다. 역사를 통해 섭리적으로 보존하신 것을 믿지 않는다면 역사를 통해 보여 주시는 필사본 증거들도 전혀 바르게 평가하거나 연구할 수 없다. 문제는 성경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데서 오는 차이이다. 독자들이 누구이든지 성경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하게 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풀은 마르고 꽃은 져도,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되는 것이다. BB
월간 <성경대로믿는 사람들> 2000.11. 통권 104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