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 (간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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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년만의 고백 |
제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79년 5월이었습니다. 공수 교육과 특수전 교육(구체적으로는
게릴라 침투나 사회소요에 대비한 훈련)을 마치고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에
배치된 것은 9월 말경이었는데, 다음달 10월에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12ㆍ12 사태가 발생하면서 특전사 장병들은 당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던 신군부 세력의 기반이 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1979년 12월 30일경
종무식을 하면서 연초 3일간의 휴무에 들어갈 때 마지막 종회 시간에
들어온 중대장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공수 요원들은
점프(고공 낙하) 수당으로 일반 보병 부대의 병사들보다 많은 봉급을
받고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새해부터는 특전 병사들을 200%의
봉급과 500%의 점프 수당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대우 향상을 약속한다는
것이었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들뜨고 즐거워하던
부대원들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당시 일병이었던 저도 그 이야기를 믿고
저의 봉급을 계산하니 꽤 큰 액수여서 군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아마 이러한 조치들은 특전
요원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친위대로 만들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의도한
선심이었을 것입니다. 5월이 되자 공수
요원들은 신발끈도 풀지 못하고 전투복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며 언제라도
출동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해야만 하였습니다. 또 비상 계엄이
선포되기 며칠 전인가는 특전사령관이 공수여단 산하의 모든 부대에
1,500만원씩의 하사금을 내려 우리 대대에서도 400만원을 받아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며 큰 회식을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대기하며
우리는 정신 교육을 받기도 하였는데, 강사는 부마 사태를 진압한 여단의
한 부대장이었습니다.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단호하게 시위를
진압하였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고 부대원들 역시 그것을 영웅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우리가 퇴각하던
그 날 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던 조선대 앞에서는 무서운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9시쯤이었을 것입니다. 뒤따르는 시위대를 막기
위하여 군인들은 최루탄을 계속 터뜨리며 퇴각하였는데,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반복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중 일부가 소방차를 탈취하여
군인들의 저지선을 뚫고 지나가는 위험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또 밤하늘에
화광(火光)이 솟았는데 후에 듣기로는 세무서인가가 불에 타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날은 이미 어둡고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장갑차를
앞에 놓고 공포 사격으로 시위대를 막던 대대장은 무전으로 급히 실탄
사격을 요청하는 것 같았는데, 허락되지 않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자꾸만
조르는 것 같았습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시위대가 군인들의 돌아가라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온 것은 조선대 내에 잡혀 있는 시민들을
풀어 달라는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과격한 일부 학생들이 소방차로 저지선을 뚫기도 하고 돌을
던지며 기습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어두운 밤에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은 군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하였고, 장갑차를 앞세워
추격하며 잡히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도 하였는데, 아마 이날
밤이 광주사태에서 본격적인 살륙이 시작된 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고삐 풀린 상황 앞에서 저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들은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대학 앞 주택가였을 것입니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성과 최루탄 연기에 주택가의 불은 다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절규와 고함들과 비명들로 범벅된 아비규환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저는
거리에서 군인들에 의해 맞아 거의 초 죽음이 된 한 시민을 발견하였고,
순간적으로 부대를 이탈하여 그를 업고 어느 민간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했을까요? 그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부대에 복귀한
21일은 광주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날일 것입니다. 저의 부대 복귀가
무전으로 지휘관에게 알려지고, 저는 우리 부대가 쉬고 있던 상무대로
트럭을 타고 가게 되었는데, 군복에 피가 범벅되어 돌아온 저의 모습을
보고 직속 상관은 크게 화를 내면서 저를 심하게 다루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저는 그가 제게 한 말이 가슴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밤새 나
때문에 애태운 것을 생각하면 화도 날 만하겠지만, 그는 내가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이고 평소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이 아닌지라 극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그의 말인즉 비상 계엄하에서
부대 이탈이란 즉결 처형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밤새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다 아는데, 여기는 전쟁터이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바로 행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게 말하며 저의
부대 이탈에 대해 얼마간 때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은 그 중대장과 다른 지휘관들의 처리에 일말의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기
전 비교적 이른 아침 시간에 있었던 일도 기억이 납니다. 도청 분수대
앞에서 시위대와 군인들이 대치를 하고 있는데, 시내버스를 탄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시위대를 뚫고 나가 군인들에게 위협적으로 돌진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군인들이 흩어지고 그 차량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게 되었는데, 이에 화가 치민 군인들은 분풀이라도 하듯
갑자기 길가로 뛰어들어 지나가는 시민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다.
마침 고무신을 신고 잠바차림으로 길을 지나던 40, 50대의 남자가 군인들에게
걸려 들었고, 그는 금새 진압봉에 맞아 기절하였습니다. 주변의 사태는
점차 술렁이며 다급해져 갔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 사람의 생명이 위험할 것 같아서 급히 뛰어들어 그를 안고 피신시키려
했습니다. 덩치가 큰 사람이었고 내 힘만으로는 부쳐 쩔쩔매고 있는데,
다른 대대의 중사 한 사람이 뛰어들어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수백 명의 공수 요원들이 이를 보았고, 우리는 그를
끌고 안전한 곳에 피신시킨 후 시민들에게 이 사람을 좀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같은 중대의 상급자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내게 대검을 들이밀면서 너 죽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너는 아군이냐 적군이냐?” 21일의 도청 앞 발포사건은
돌진하던 시위대 차량들로 인해 퇴각하던 군인 장갑차에 의해 우리 대대에
속한 병사가 깔려 죽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일어났습니다. 장갑차가
밀려나면서 공수요원들의 저지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도청 앞 광장은
돌진하는 시위대와 그들의 차량들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다급해진 군인들은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나 사격으로 대응하였습니다. 발포와 함께 시위대는
흩어졌고, 우리는 도로에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도청에서 조선대로
퇴각한 후 우리는 곧바로 긴급한 철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때에 조선대
광장에서 장갑차가 학교 주변의 주민들과 아이들, 그리고 호기심에 찬
구경꾼들을 향해 계속해서 사격을 해댄 것도 기억이 납니다. 철수하는
군인들을 보호하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은데, 여기서
실제로 조준사격을 하였는지 아니면 위협 사격으로 사람들을 흩뜨리기만
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산중에서는 아마
포로로 잡아 왔던 대학생을 총살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
일을 저는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을 목격한 다른 대대의 병사 하나가
제가 아는 후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왜 이런 부대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더란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습니다.
당시 그 일은 부대 내에서 소문으로 돌기도 하였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후 공수부대가 머물렀던 그곳에서 총상을 입은 유골이 발견되어 그것의
증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어디 그뿐이었겠습니까? 다른 대대의 한
중대가 국도변에서 매복을 하다가 시위대 차량을 발견하고 집중 사격을
하여 많은 숫자의 학생들을 사살한 일도 발생하였는데, 당시 그 버스에
탔다가 유일하게 생존하여 후에 그 일을 증언한 한 여학생은 군인들이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을 하나하나 확인 사살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계절은 신록의
봄으로 산하는 한없이 푸르렀고 생명감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월 24일, 이 날은 저뿐 아니라 많은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요 처참한 비극의 날이 됩니다. 잠시 후 송암동이라는
곳에서는 그러한 것보다 더 끔찍하고 제가 경험한 광주사태 중 가장
처참한 일이 벌어집니다. 광주 보병학교 일개 중대가 무반동포로 무장하고
매복하다가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차량이 나타나자 이를 시위대
차량으로 오해하여 사격을 해대는 일이 발생한 것이 그것입니다. 긴
시간은 아니었고 5분 내외의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그때 저는 도대체
어떻게 군인들이 평온한 주택가를 향해 사격을 해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며 몸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다가 머리 부분에 총상을 입는
일을 당했습니다. 제가 처음 무언가
제 신체에 총격이 가해진 것을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실상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직 희미하나마 의식이 있었고,
만약 죽더라도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제가 어디에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었고 어떤 상태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떨리는 심정으로 저를 확인했습니다.
머리 뒤를 만졌는데 피가 낭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얼굴을 더듬었는데,
이는 만약 총알이 머리 뒷부분을 때리고 관통했다면 앞으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이 일로
말미암아 9명의 군인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2명은 병원에서 죽었으며,
40명 이상의 병사들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또 동료들의 죽음과 부상을
목격한 군인들이 어리석고 무모한 분노에 사로잡혀 주변 마을을 찾아가
동네 젊은이들과 가축들을 쏴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압니다.
도대체 시내와는 동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의 주민들과 군인끼리의
오인 사격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요? 아마 그런 만행을 행한 일부
군인들은 광주 사람은 곧 적이라는 적개심으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앞서 기술하지 않았지만 도청 앞에서 장갑차에 군인
한 사람이 죽게 되었을 때, 그와 가까운 하사관 한 사람이 부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난사를 하였노라고 으쓱대던 기억이
겹쳐집니다 장갑차가 깨지면서
그 속에 타고 있던 6명 중 3명이 죽고 대대장을 비롯한 3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그 중에는 전역을 열흘도 안 남기고 죽은 억세게 재수없는
병사도 있었고,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사병들과 시위대들에게
난폭하게 행동하던 참모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비록 진압군의 일선
지휘관으로서 시위진압의 책임을 떠맡고 원치 않는 학살의 악역을 맡기는
하였으나, 부대 내에서는 투철한 군인 정신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천주교 신자인 대대장은 왼쪽 팔이 잘려 나가는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저의 광주에 대한 회고는 여기서 끝납니다. 광주사태가 진압된 뒤 저는 연고지를 찾아 대전 통합병원으로 이송되어 광주를 벗어나게 되고, 그 후 입퇴원을 반복하며 9개월여의 병상 생활을 하게 됩니다. 후에 부대로 복귀한 후 광주사태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한 27일의 작전에 참여한 병사들의 이야기를 간혹 듣기도 하였지만, 그 끔찍한 전말에 대하여 제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바는 없습니다. 단지 최신의 무기로 무장되고 고도의 훈련을 갖춘 최정예의 공수 요원들을 맞아 카빈과 M1 소총으로 무장하고 단지 의분과 애국심 하나만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 가며 도청과 시내를 사수하려던 시위대의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무모함에 한없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가질 뿐입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수적으로나 전투력으로나 상대가 될 수 없는, 죽기를 결심한 행위일 뿐 구차히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27일 새벽 무사히 시내 탈환 작전을 마무리한 특전사가 승리자인 양 그 전공을 자랑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일국의 최정예 군부대가 아무런 훈련도 작전도 없이 급조된 시민들과 학생들로 구성된 소수의 시위대를 무참히 학살하고 이겼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막상 군인들이 진입하였을 때 시위대는 차마 총도 쏘지 못하고 망설이는 어린 학생들이었다고 합니다. 과거 5공, 6공 시절에는
광주에서 죽은 병사들의 묘비에는 언제나 그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국난을 극복한 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특전사 전역 병사들의 모임도 있어
왔지만, 군부 세력이 몰락하고 광주에서의 만행과 그들의 비행이 천하에
알려진 뒤로는 그런 모임조차 흐지부지 사라지고, 다만 사랑하는 자식들의
애꿎은 죽음을 슬퍼하는 유족들의 조문만이 겨우 이어질 뿐입니다. 제가
잘 아는 그들의 묘비에는 일병이었던 사람이 상병으로 중사였던 이들이
상사로 진급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도대체 이것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광주에 투입되어 그저 시키는대로 하다가 고귀한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그들의 불행과 가족들의 비극이 보상될 수 있겠습니까? 매년 5월이 오면
저는 광주가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지난 20년 가까이 저는 제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차마 그곳으로 발을 옮기지 못하였고, 올해도 역시
그랬습니다. 【 간증인 "이경남"은 1980년 광주 민중항쟁 당시 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 소속 군인이었고, 현재는 강원도 횡성에서 감리교회 목사로 있음. 이 글은 이경남 목사가『당대비평』에 투고해 실린 글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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