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0. 5. 19:32

" 에세이 모음 - (6) "

【 글모음 】                  " 에세이 모음 - (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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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게 사는 길 "

  옛날의 우리 조상들은 쌀을 퍼가지고 가서 옷감과 바꾸었고 일꾼의 품삯을 콩 몇 되, 보리 몇 말로 치렀으므로 사실상 돈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도 살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감투를 탐내는 시골의 부자가 서울 사는 정승을 한 차례 찾아볼라치면 소달구지에 제 고장 특산물이나 한 바리 해 싣고 어쩌다 캐낸 산삼이라도 한 뿌리 비단 보자기에 곱게 싸들고 가면 될 일이었다.
  돈이 언제부터 우리 살림에 이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하여간 오늘날 돈은 무서운 위력을 지닌 괴물처럼 이 사바세계에서 판을 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세 살 난 어린애로부터 여든 살 먹은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입을 가진 사람은 죄다 '돈, 돈'하니 이 세상이 어딘가 잘못된 것만은 확실하다. 돈이 대관절 무언데 이다지도 '돈, 돈'하는 것일까?
  물론 돈만 있으면 땅도 살 수 있고 집도 살 수 있다. 맛나는 음식이나 화려한 옷, 금은보석상에 진열된 모든 값진 것들이 다 제것이 될 수 있다. 아침 저녁 만원 버스에 시달리는 것보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것이 편한 것은 확실하고, 돈만 있으면 롤스로이스나 벤츠 같은 비싼 차도 사서 타고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돈을 가지고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호화롭게 살 수는 있어도 평화롭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일이 돈만 가지고 될 수는 없는 법이다. 행복을 돈 주고 샀다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정신적 차원의 기쁨을 물질적 차원에서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나만 잘 살아 보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보자'는 격려는 더욱 잘못된 것이었다. 잘 살기 위해서는 돈이 많아야 하고, 남부럽지 않게 잘 살기 위해서는 돈이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한심스런 생각이 이 나라 백성들을 돈의 종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수출고나 개인소득의 액수만 가지고 인간의 행복을 측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정신적이며 도덕적인 존재이므로 그러한 욕구가 충족되기 전에는 사람에게 행복감이 있을 수 없다.
  '잘 살아 보자'는 구호에 앞서 '바르게 살아 보자'는 부르짖음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각자가 단지 잘 사는 것만을 추구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분쟁, 사기, 모략, 중상, 부정, 부패와 같은 독버섯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우선 거짓을 몰아내고 스스로 타고난 능력이나 재간을 제대로 발휘하기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제 돈은 한 푼도 없으면서 순전히 남의 돈만 가지고 재벌이 되고자 꿈꾸는 가운데 사기와 협잡을 일삼는다든가, 뻔히 참새이면서 황새 걸음을 걸음으로써 신세를 망치는 일이 있어서도 안된다.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행복은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자리에 있어야지 물질에 짓눌려 있어서는 안된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대학에 들어가 전공을 택하는 데서부터 자신의 소질이나 적성을 살리려 하지 않고 '돈벌이'가 좋은 분야나 출세에 도움이 되는 과에 머리를 싸매고 몰려드는 현상도 서글프거니와, 일단 대학에서 문학이나 어학, 예술이나 미술을 전공하고도 사회에 진출하는 마당에는 오히려 전공을 버리고 수입이 좀 나은 기업체에 들어가 책상이나 붙잡고 앉아 있기를 바라는 이 추세는 더욱 통탄할 만하다. 그렇게도 자존심이 없는가?
  '나만 잘 살아 보겠다'는 따위의 천박하고 저속한 철학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망치고 있다. 다만 몇 푼이라도 더 준다고 하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직장을 옮기고 일터를 바꾸는 일을 조금도 나무랄 수는 없을 것 같다. 사회적 풍토가 그렇고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이 그런 터에 어찌 젊은이들만이 올바른 인생관을 지녀주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는 나라라도 돈이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돈보다 귀한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부강한 국민이 되느니 보다는 정의로운 질서 위에 사는 정직한 국민이 되는 것이 백 배는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잘 사는 것보다는 바르게 사는 일이 더 시급하다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 흰 눈 속의 푸른 소나무 "

  내가 한국에 태어난 사실을 고맙게 여기는 분명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종족상으로는 몽고족에 속하는 내가 미국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하자. 부모를 잘못 만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 하에 견디다 못해 망명을 갔거나, 살기가 어려워 이민을 떠난 그런 아버지, 어머니가 하와이의 어느 파인애플 농장 한 구석에 낳아 주었다면 내가 무엇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또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이민 간다는 사람들이 많고 또 실제로 가서 사는 사람들이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뉴욕 같은 도시에는 우글우글하다. 길이 있어서, 또는 길을 뚫어서 타향살이를 자원해 가는 이들을 나무랄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그 부모는 사실상 그 자녀들에게 훌륭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때로는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는다.
  피부가 옥같이 희고 맑은 사람들 틈에, 검거나 누르스름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끼어서 살기가 힘겨울 때도 많을 것이다. 또한 콧대가 높은 사람들 틈에 얼굴의 굴곡이 없다시피 평평한 동양인이 함께 살기란 매우 피곤할 것이다. 전문직에 있어서 월급을 백인보다 많이 받는다 해도 미묘한 심리적 갈등은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인 내가 한국 땅에서 살 수 있는 일이 고맙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나는 우리 민족을 좋아하고 한국의 음식을 즐기고 한국의 예술을 아끼는 것은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끄는 것은 한국의 자연이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란 말이 있지마는 비단에 수를 놓는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산천을 만들 수가 있겠는가?
  웅장한 산, 넓은 땅은 하늘 아래 많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아기자기한 산과 강, 들과 골짜기는 여기밖에 없다. 작아도 답답하지 않고, 예쁘면서도 얄밉지 않은 것이 한국의 산천이다. 그뿐인가? 계절의 변화는 가히 절묘하다 하겠다. 나는 일 년 내내 춥기만 하거나 일 년 내내 덥기만 한 그런 나라에 태어나지 않고 춘하추동의 변화가 그토록 미묘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고맙다는 말이다.
  봄에는 감격한다. 감격없이 맞는 봄이 나의 오십 평생에 단 한번도 없었다. 영국 시인 브라우닝(
Robert Browning)은 이탈리아에 살면서 고향이 그리워 이렇게 읊었다.

  영국에 있었으면
  거기는 지금 4월이려니...


  나도 외국에 살면서 몇 차례 고향의 봄을 그리기만 했던 경험이 있지마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실려 찾아오는 우리의 봄! 그 추억에 한 해를 산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짧은 봄은 긴 여름으로 이어진다. 여름은 나에게 자신을 주는 계절이다. 보신탕 한 그릇을 안먹어도 한여름 내내 원기가 왕성하다. 하기야 어느 시인이 '녹음방초(綠陰芳草)가 승화시(勝花詩)'라고 하였다.
  푸르르게 우거진 나무 그늘, 향긋한 풀향기가 꽃 피는 계절 못지 않게 좋다는 뜻이니 여름은 위대한 계절이다.
  장마철에 큰 비 쏟아져 문경 새재의 골짜기마다 도도하게 흐르는 큰 물을 본 일이 있는가? 그 물이 충청도 쪽으로 곱게 흐르면서 수옥(漱玉)폭포를 이루었는데, 한여름에는 장관이다. 비가 개이면 새재 꼭대기에 있는 이 백 년도 더 된 전나무에서 매미가 시원한 소리를 내며 운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시인의 노래가 과연 그럴 듯하다.

  한국의 가을은 삶의 적막을 느끼게 하는 처량한 계절이다. 한국인이 센티멘탈한 국민인 것, 그리고 아울러 생각하는 국민인 것은 가을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가을이 없었던들, 정철, 윤선도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태어났어도 그런 노래를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을이 없었던들, 원효와 퇴계가 이 역사에 없었을 것이고, 설사 태어났어도 그런 깊은 사색의 열매를 남기고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소월과 이상, 홍난파와 이중섭은 이 나라의 가을의 작품이요, 가을의 소산이다.
  한국의 겨울은 흰 눈과 소나무가 대표한다. 백두산, 설악산이 다 백설을 연상하고 지어진 이름들이 아닌가? 언젠가 우리는 가 볼 수도 없는 백두산 정상에서 천연색으로 사진을 찍어 가지고 온 일본인이 있었는데 그 사진에 노란 꽃이 피어 있으니 봄인가 여름인가 분간하기 어렵지만 하여간 천지(天池)의 둘레에는 흰 눈이 쌓여 있어 과연 '백두'임을 실감하게 하였다.
  나는 설악산에 여러번 가 보았다. 춘하추동을 가리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가 보았다. 여름에 처음 보았을 적에는 하도 산의 나무가 무성하기에 어쩌면 이렇게 푸르른 산에 설악(雪岳)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의아스런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그 산을 겨울에 보고 비로소 그 맛과 멋을 알았다. 설악산이 겨울 산인 줄을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그 흰 눈에 우뚝 서 있는 연륜 수백 년의 푸르른 소나무 그것이 한국의 겨울임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 왜 사느냐고 묻거든 "

  반드시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왜 사느냐?'는 물음을 자신에게 수없이 던지면서 하루 하루의 삶을 이어 나간다. '왜?'하는 물음이 우리에게 없었던들 우리가 다른 짐승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먹고 마시고 물고 뜯고 때로는 좋아하고 새끼 낳고 장난치면서 이 날 이 시간까지 꼭같은 삶을 되풀이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원시인이던 10만 년 전에도 짐승들은 오늘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고 그때부터 10만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자연 도태된 짐승들도 꽤 있다고 하지만) 호랑이의 굴은 여전히 호랑이의 굴이고 독수리의 둥지는 여전히 독수리의 둥지이다. 그런데 사람은 영 몰라보게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다.
  '왜?'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이 되었다. 만일에 우리의 조상이 하늘의 별들을 보고 '왜?' 하는 물음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하지 않았다면 점성술도 생기지 않았고 천문학도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에 아이작 뉴턴이 사과가 나뭇가지에서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왜?' 하고 묻지 않았다면 과학이 오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까?
  사람과 친숙한 동물이 개인데, 동물 행동학의 권위자로 노벨상을 받은 '콘라드 로렌츠'는 개는 사람이 몽둥이를 들고 그 뒷다리를 후려갈기면 자기가 잘못했다고 믿고는 한 번도 '내가 왜 맞아야 하나'하고 따져 보는 일이 없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그래서 그는 개를 가지고 생리학 실험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개에게 고통을 주면 줄수록 개는 복종만 더 하며, 그 고통의 원인이 자기의 잘못에 있다고만 믿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도 그런 경향이 있고 특히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 전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절대 복종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말이면 그만이다. 아버지의 명령이나 행동에 대하여 '왜?'하고 묻고 나서는 것은 매우 부도덕하고 상스러운 일로 여겨 왔다. '아버지가 하라면 할 일이지, 이놈아, 왜라니 버릇없는 후레자식!' ─ 이렇게 당장 벼락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서당에 가면 훈장에게도 같은 복종을 해야만 했다. 천자문을 가르치는 훈장이 말이 어눌한 사람이어서 '바람 풍'한다는 것이 혀가 짧아 '바담 풍'하면 글 배우는 아이들도 그대로 받아서 '바담 풍'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금이 하는 말, 임금이 하는 일은 다 절대였으므로 어느 누구도 감히 그 말과 그 일에 대하여 '왜?'하며 따지고 들지 못했다. '왜 쿠데타를 감행하였소?'하고 이성계에게 대들었다가는 살아 남을 수가 없었다. 고려의 옛 임금이 그리워,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하고 말 한마디라도 입밖에 낸 자는 어김없이 예성강의 고기밥이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왜? 왜? 하는 놈은 그냥 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이 '어린 백성'이 '왜?'하는 한마디를 마음 놓고 해보지 못한 채로 이 날에 이르렀다. 오죽하면 왜정 시대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고 '왜? 왜? 하면, 왜놈이 잡아간다'고 하였겠는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왜?'라는 당돌한 질문을 자연과 사람을 향해 던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인류의 오늘이 있게 되었는데 어째서 우리의 사정은 줄곧 그렇지가 못하였을까? 그 대답은 뻔하다. '왜? 왜?'하다가는 끝내 목숨을 잃게 되거나 매를 맞아 허리가 부러질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렌츠가 개를 두고 한 말이 다시 생각난다. 개는 얻어 맞으면 으레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믿고,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복종하고자 하는 뜻만 더욱 굳어진다고 한다. 사람이 개를 닮아간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이 또 있겠는가? '왜?'가 없던 역사를 '왜?'가 있는 역사로 바꾸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신성한 임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선 '왜 사느냐?'는 질문부터 던지고 그 반응을 한 번 살펴 보기로 하자. '왜? 사느냐?' 이렇게 물으면 어떤 한국인들은 월파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끝절을 가지고 대답을 삼기도 할 것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
  이 웃음은 참으로 묘한 웃음이다. 남편의 친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기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줄곧 모나리자가 지은 야릇한 웃음도 아니요, 9백만 원 주택복권에 당첨되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어느 학교 도서관 수위의 흐뭇한 웃음도 아니다. 이 웃음은 '왜 사느냐?'고 묻는 그 물음 자체를 비웃는 웃음에 지나지 않는다. 삶에 이렇다 할 목적이 있는게 아니고 부모가 어쩌다 낳아 주었으니 그저 사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지극히 퇴폐적인 반응이다. '웃지요'를 어찌하여 그토록 나쁘게 말하는가 하면, 삶에 대한 어중간한 무관심(이것도 철저하면 도통한 어떤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나)이 기회만 있으면 쾌락을 탐하여 타락의 길로 빠지는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건전한 오락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글세, 진정한 뜻의 건전한 오락이 있을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까닭은, 이런 사회에서 어떤 한 사람의 오락은 엄밀하게 따질 때에 다른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사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과 시간의 여유를 듬뿍 가진 사람들이 어디 '건전한 오락' 따위로 만족하게 되는가! 술과 여자, 히로뽕 아니면 도박, 오늘날 재벌 2세라고 불리는 젊은이들 중에서 꽤 많은 친구들이 이런 병을 앓고 있거나 그런 증세를 보이고 있다.
  돈을 벌려는 한 가지 뜻만을 가슴에 품고 악착같이 사는 무리들도 적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욕심을 나무라지 않을 뿐더러 훌륭한 야망이라고 오히려 칭찬한다. 그래서, '돈을 좀 벌어야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젊은이를 격려해 주는 사람들은 많아도, '이 사람아, 돈만을 좇다 보면 미리 생각도 못했던 함정에 빠질 염려가 있으니 조심하게'하고 일러 주는 어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돈이란 되도록 짧은 기간에 되도록 많이 버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남을 속이고 남을 못살게 만들더라도 돈만 벌면 왕이 된다. 그를 찾아와 연상 굽실거리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그런데, 돈을 좇는 사람치고 잡은 것만 가지고 만족하는 위인은 드물다. 1억만 있으면 되겠다고 하던 사람이 1억 원을 벌면 2억 원을 바라고 2억 원을 손에 쥐면 3억 원을 노리게 되니, 자본주의의 약점이 바로 이런 데에 있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자식들 때문에 산다는 사람들도 꽤 많다. 혼자 뿐이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만 그래도 아들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살아야겠다는 사람들이다. 하기야 오늘에 살아 있는 우리의 태반이 그런 부모들이 있어서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만일에 우리의 부모가 그런 책임도 느끼지 않고 자식을 키우는 일에서조차 아무런 뜻을 발견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버려진지 오래 되었을 것이고 살아 남았을 가능성은 아주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자녀는 생물학적으로 볼 때에 자기 목숨의 연장이니까 거기서 삶의 보람을 찾는 일을 마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사람의 생명을 동물의 차원에서만 다루는 일이 결코 옳지는 아니하다. 엄밀한 뜻에서 '내 자식'이란 없는 것이고, 핏줄을 따지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앞으로는 가족이나 자녀도 정신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고, 지금이 그때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복음 12:48)"하고 물으신 뒤에 거기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그 사람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태복음 12:49-50)'라고 한 것이다. 제자들로부터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서 찾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 그분은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핏줄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문제이기 때문에 혈연 관계에나 매달리는 사람은 시대의 찌꺼기처럼 역사의 길목에 버림을 받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가족 때문에 산다는 사람도 반성할 여지가 있다.
  이제 와서 충효를 강조한다고 해서 쓰러져가는 초가집이 얼마나 더 오래 지탱될 수 있을 것인가? 낡은 시대의 유물, 봉건 제도의 찌꺼기, 가뜩이나 가족 때문에 살아서 도무지 보람있는 일을 못해 보는 이 국민에게 또다시 효를 강조하는 것은 식견이 모자라는 처사일 뿐 아니라 그 뒷동기마저 의심스럽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있어야 할 것은 충효가 아니라, 정직해지려는 노력이나 책임을 다 하고자 하는 정성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 살림이 온통 거짓으로 뒤덮였고 사람들이 제 할 일은 아니 하고 남의 흉만 보는 바로 이것이 탈인데, 충효사상 앙양은 또 하나의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게 아닐까?
  가족을 돌보고 사는 사람이 가족도 돌보지 않는 사람보다는 백배나 더 우러러볼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런 삶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애국운동을 한답시고 집안을 전혀 돌보지 않아 자식들은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채로 길거리를 헤매고 아내는 이 집 저 집에 구걸이나 해야 먹고 사는 형편을 두둔할 수는 없다.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은 얼마나 빛좋은 개살구냐! 궁극의 목적은 자기 배를 채우는 데에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체하고 큰 소리만 치던 사람들도 이제는 많이 기가 죽었다. 아니, 한 30년 동안 속여 먹었으면 됐지, 그 이상 또 어쩌자는 것인가? 그래도 아직 여기 저기에서 '애국'을 팔아먹는 자들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한자리 하면 먼저 제 집부터 크게 짓고 좋은 물건 사다가 집안 꾸미고 어린 아들 딸을 몰래 몰래 외국에 보내 공부시키면서도 입으로는 애국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다.
  유명해지려고 사는 사람도 많기는 하다. 삶의 보람이 오직 그것뿐이다. 오늘 한자리 잡고 앉은 사람들만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말은 아니다. 유명해지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가 않아서 초야에 묻혀 사는 사람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이다. 유명한 사람에게 아첨하는 인간이나, 반대로 그런 사람을 시기하는 인간이나 결국은 '오십보 백보'라고 생각한다. 배우이건 가수이건 정치인이건, 인기가 없으면 시들한 사람들은 다 이 테두리에 속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학문을 위해 산다는 사람들을 우리는 존경한다. 우리 나라에 서식하는 민물고기와 바다고기만을 연구하여 여든 살에 이르렀다는 어느 어류학자가 최근에 책 한 권을 펴냈는데 거기에는 9백 종류에 가까운 어류를 다 실었다. 그 책을 쓰는 데에는 10년 남짓한 긴 세월이 걸렸다고 하니 그 수고를 치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학자가 이 나라에 몇 사람이나 더 있을까?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되는 것이 오직 이름을 날리려는 한 가지 욕심 때문이니, 불공보다는 잿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나 할까?
  안할 말이지만, 학자라는 사람들처럼 마음은 좁고 명예욕만 그 속에 가득찬 족속도 많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명함을 남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데에만 급급하게 부스러기 지식일지라도 이것을 어떻게 최대한 우려 먹을까 하고 마음을 조릴 뿐이다. 답답한 일이다. 그러니, 이 나라에는 학자가 없고 오직 학문의 보따리 장사만이 있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아인슈타인은 언젠가 그의 상대성 원리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가름하는 중대한 실험이 있는 시간에도 그토록 태연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떤 신문기자가 그 실험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옳다는 것이 증명된 뒤에 그를 찾아가, '선생님, 그 시간에 얼마나 초조하셨습니까?' 하였더니, 아인슈타인이 의아스런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며 '이 사람아, 내가 초조할 까닭이 무엇인가, 진리가 밝혀지는 것만이 문제이지!'하고 말했다. 얼마나 시원한 반응인가! 그런 삶에 보람을 느끼는 학자는 이 땅에 없을까?
  우리는 예술을 위해 사는 사람을 참으로 존경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그 일을 함으로써 밥을 먹고, 고생 끝에 얻은 작품이 후세에까지도 값있는 것으로 남는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하고 보람있는 나그네의 삶은 없을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인류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건축한 베드로 성당은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있어서, 사람의 머리와 손이 이룬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줄 것이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삼팔선에 가리워 보이지 않는 금강산의 화려함을 지금도 유감없이 우리에게 보여 준다. 예술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위해서 사는 것은 더욱 아름답다. 남의 자유를 지켜 주려고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는 삶은 더욱 고상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한마디를 남기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간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삶을 살고 간 사람이다.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며, 매인 자를 풀어 주려고 그분은 괴로운 삶을 의롭게 살고 간 것이다. 그처럼 자유를 위해 힘차게 살 수만 있다면 아픔도 외로움도 두려워할 것은 못된다. 끝에 가서 이기는 것만 확실하다면 죽음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자유를 거치지 않고서는 참된 평등을 실현할 수가 없다. 폭력으로써 이루어진 평등은 늘 불안한 것이다. 따라서 주변의 환경이 변할 때마다 그 평등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소련을 빠져 나온 젊은 망명객 '블라디미르 부코프스키'가 뭐라고 증언했는가? 소련에는 자유가 없을 뿐더라 올바른 평등도 없고, 거대한 소련의 사회를 버티는 기둥은 허위의 기둥뿐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사람의 타고난 권리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거나 그것을 바로 잡아 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참 사람일 수는 없다. 그것은 곧 거짓이다. 산송장이 별 것이 아니다. 정의감이 없는 사람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몸은 살았어도 정신이 죽었으면 송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평등은 꼭 있어야 하지만 그 밑바닥에 사랑의 샘이 흐르고 있지 않다면 그 평등은 사람에게 행복보다는 오히려 괴로움이 더 할 뿐이다. 아들 딸 사남매에게 먹을 것을 골고루 나눠 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그 집의 평화와 행복이 유지되는데, 나라의 평화와 행복도 또한 그렇다. 죤 러스킨의 경제관에 새로운 차원을 마련해 준 것은 '마태복음 20장'에 있는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하고 말하니 그들은 일하러 갔다.
  주인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하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들고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은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십니까?'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맨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그 주인의 사랑이 일꾼들에게도 전해져서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인류의 오랜 꿈이라면 꿈이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 꿈 때문에 산다고 말하고 싶다.
 

 

& 김 동 길(金 東 吉)/『 절망과 좌절에 대하여 』... 】

 

 

 

※ 이 글은 "여성중앙 - 85년 1월호 별책부록",우리에게 주소서 (오늘의 지성 10인 에세이집)』이라는 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0년전의 글인데도 오늘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인생의 모습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으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부정하고 순수하지 못함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치유받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다면 영원히 변화될 가능성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대한민국과 전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2006. 10 ....
HanSaRang ...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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