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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 " 여성의 아름다움 "
남성의 입장에서 볼 때 여성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아름다움에 있다. 아무리 오대산의 단풍이 아름답고, 맑게 개인 한국의 가을 하늘이 정다웁다 하여도, 들국화 사이로 사뿐히 걸어가는 정돈된 몸매의 여인의 아름다움과는 비길 것이 못된다. 남자와 비슷한 여자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근년의 여성해방 운동에 헌신하는 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나 여권운동의 진정한 목적이 이 여자들을 남자와 비슷하게 만드는데 있다고도 믿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어쩐지 불안하다. 태권도를 하는 여자, 직업적으로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여자, 레슬링을 하는 여자들에게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그런 것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손상케 하기 때문이 아닐까,「성의 정치학」을 쓴 '케이트 밀렛' 같은 여성은 필시 내 말에 정면으로 도전하겠지만 문제는 내가 그런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갖고 있지 않고 또 갖고 싶지도 않다는 데 있다. 그런 사람과 사회개혁을 논하고 그런 목적에 협력할 뜻은 있으나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가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Sic et Nonː是와 非」이라는 책으로 유럽 중세철학에 일대 전기를 마련한 석학 '아벨라르'의 애인 '엘로이즈'가 그 놀라운 학문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주고받은 서간문들이 그 두 사람의 관계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 여성의 매력을 또한 입증하고 있다.「신곡」을 쓴 단테의 베아트리체는 미모의 소녀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테라는 한 위대한 남성을 평생 감격시키고 마침내 그를 낙원으로 안내하리만큼 큰 인스피레이션의 원천이 되지는 못하였을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이 여성의 아름다움이냐 하는 질문에 대하여서는 의견이 구구할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객관적인 척도는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나 중국의 양귀비를 절세의 미인이었다고 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마릴린 먼로 같은 여성을 매혹적 미인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그런 표현부터가 부당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미스코리아니 미스유니버스니 하는 미인 경연대회에서 일등으로 뽑히는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여성의 미를 그런 식으로 가려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36, 24, 26 이니 하는 규격, 또는 키가 얼마나 되어야 하고 무게는 얼마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따위의 조건들은 아름다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부질없는 장난밖에 되지 않는다. 키가 작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 몸이 뚱뚱해도 미를 지닐 수 있다. 영국 시인 '키이츠'의 말을 빌면, "아름다운 것은 참된 것, 참된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을 빼고는 아름다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이쁜 영화배우라도 얼굴의 아름다움이 성형수술의 결과라고 한다면 우리는 자연 그 아름다움 자체에 어떤 의심을 품게 된다. 아무리 잘 생긴 캠퍼스의 여왕이라 하여도 그가 시험 때에는 부정행위를 교묘하게 하고 친구의 돈을 꾸어 쓰고도 갚을 생각을 안하는 학생이라면 그 사실이 알려지는 즉시로 그의 아름다움이 추악한 것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안으로 '참'을 간직함이 없이 밖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안에 진실이 없으면서 밖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어서 오래지 않아 시들고 마는 법이다. '미인은 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뭇남자의 눈을 끄는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대개 진짜가 아니라 가짜이기 때문에 그런 미인의 운명은 자연 기구하고 그 팔자는 또한 사나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여성의 참 아름다움은 겉옷에 있지 않고 속옷에 있고, 속옷보다는 그 피부의 깨끗함이 더욱 중요하고, 또 피부보다는 그 몸의 흐르는 피가 맑아야 하고, 그 피가 흐르는 체내의 모든 기관이 건강해야 하며, 그런 육체적인 건강보다도 그 여성의 마음 가짐, 진실성 등등이 한 여성의 미를 형성함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매슈 아놀드가 '도어버 비이취'라는 시에서, 물질문명에 밀려 어수선하여진 19세기의 서구세계를 바라보며 "아 사랑이여 우리는 서로 진실하자"라고 하였을 때, 그는 자기의 아내를 향해 아름다움의 필수적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진실한 바탕만 마련되어 있다면, 남자의 눈에 모든 여자는 다 아름다워 보인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소년시절에 특히 그렇고, 불혹의 40고개를 넘으면서 남성의 눈에는 모든 여성이 또 다시 아름답게 보인다. 독신으로 사는 남자인 경우에 더욱 심한지도 모른다. 사내는 중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자의 참 아름다움을 음미하게 되는가 보다. 날이 갈수록 더욱 여성은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니 말이다.
━ 여성과 남성의 대결
이른바 혼기를 맞이하는 여성이 부쩍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마치 사과 열매가 빨갛게 익어 사람의 눈을 끌고 화단의 꽃이 만발하여 벌을 부르고 나비를 부르는 사실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가 주고 받는 말을 들으면 퍽 이기적이고 자기들 중심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남녀가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연의 뜻을 따라 그 뜻대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붉게 익은 사과는 사람이나 짐승이 따서 먹어야 하고 곱게 핀 꽃에는 나비나 벌이 날아와 앉아야 자연은 그 뜻대로 그 식물들을 번식시킬 수 있듯이, 남자가 여자의 아름다움에 끌려야 비로소 인간은 그 종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래에는 남자는 요구하고 여자는 이에 응하는 일방적인 패턴밖에 없었다. 원시 사회에서 일시 모계중심 시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대개 여자는 남자의 힘에 끌려 그 뜻대로 어린애를 낳아 주었다. 남자도 여자도 그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아무도 이런 관계에 대해서 이의를 제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남녀관계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옛날처럼 그렇게 일방적일 수가 없게 된 셈이다. 남자가 원해도 여자가 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성이 수세에만 몰리던 시대는 다 지나간 것이다. 로렌스가「챠탈리 부인의 사랑」이나「아들과 연인들」등의 작품에서 묘사하고자 하는 세계는 남녀의 세력균형이다. 하늘의 성좌에서 별들이 피차 그 무서운 인력으로 서로 끌어당기면서도 각자 자기의 위치를 떳떳하게 지켜나가고 있는 사실이 남녀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로 그려져 있다. 참 놀라운 변화이다. 조지 버나드 쇼는 그의 작품「사람과 초인」이라는 희곡에서, 남자가 여자를 추구한다는 재래의 관념을 타파하고 결국은 여자가 남자를 추구하는 것이 뚜렷한 사실임을 지적하여 남녀 모랄의 새로운 국면을 부각시켰다. 확실히 남녀관계의 도덕관념은 급속하게 변해가고 있다. 나는 1950년대의 미국을 보고 이미 전통적인 결혼제도에 커다란 위기가 임박하였다는 것을 예감하였는데, 보스톤 근교에 있는 우스터 연구소에서 핑커스 박사가 '먹는 피임약'을 발명하여 보급시키게 된 60년대에 이르러서는 '성도덕'의 변화가 아니라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래의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상대해도 그 직접적인 영향이 남자 자신에게는 없고 오직 여자만이 그러한 관계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 영향을 받아야만 했는데, 이제 와서는 한 여자도 많은 남자를 상대할 수 있고 그런 행위 때문에 여자 자신이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새롭고 놀라운 현실인가! 그뿐이 아니다. 40년대부터 착실하게 구축하기 시작한 여성들의 경제적 기반은 60년대에 이르러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였다. 상당한 액수의 은행 예금통장을 손에 쥐고 있는 여성은 밥을 먹기 위해서 어떤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지난 50년 동안에 괄목할 만큼 증대되어 아마도 과거 3천년 동안에 못했던 일을 그 짧은 기간에 다 이루어 놓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 손에 피임약을 들고 한 손에 은행통장을 쥐고 오늘의 여성은 과거의 남성들이 홀로 지배하던 우리 인간사회를 누비고 있다. 지금까지는 남성들끼리만 경쟁하면 되던 것인데 그 싸움터에 머리 좋은 여성들도 뛰어들어 이제는 사실 더 큰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현상이 남성의 건강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그뿐인가? 재래의 습성으로 하면 회사나 관청에서 상관에게 시달리고 집에 돌아오는 남자는 의례 자기 여자에게서 위안을 발견하고 짓눌린 '에고(ego, 자아)'를 되찾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대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셈이다. 앞으로도 남성의 고독과 소외감이 더욱 심각하게 되리라고 짐작한다. 이제는 토마스 하디의「테스」 같은 작품도 나오지 않을 것이고 나와도 사람들이 읽지 않을 것이다. 처녀가 애를 배도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처녀가 옛날처럼 그 애의 아버지를 찾아 결혼해 주기를 애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생아를 영어로 "illegitimate child" 즉, 불법아라고 했는데 이제는 불법과 합법이 모호해졌고 또 그 낱말이 주는 불쾌한 어감도 다 사라져 버린 듯하다. 일찌기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남성 편중의 인류문화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가진 이 문화가 전투적이고 편협한 까닭은 이 문화창조에 있어 여성의 참여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이 결함을 시정하는 열쇠가 여성의 손에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협조보다는 대립의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남녀관계가 장차 큰 하모니를 이루어 여성의 타고난 아름다움이 크게 공헌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 독신에 대하여
이렇게 급격하게 변천하는 남녀 모랄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내가 독신으로 있다는 사실을 퍽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내 사주팔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 번도 알아 본 일은 없지만 아마 결혼을 한 회수만큼 이혼도 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왜 그런 추측을 하게 되는가 하면 내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것은 안정된 행복이 아니라 불확실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나쁘게 말하면 나는 내 멋대로 살고 싶었고, 좋게 말하면 나는 자유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각오를 가지고 살아온 것이다. 내 생활의 직경 5미터 이내에 우수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오랜 세월 동안 내 친구가 되어, 자기들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그 기간까지 친절과 정성을 다하여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자유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와 가깝던 여성들과의 이야기 또는 현재의 내 생활의 실정을 내가 털어놓고 말하지 않는 까닭이 무슨 복잡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 민중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사실은 사실대로 고백해버릴 만한 용기도 없지는 않다. 요 다음 순간에야 어떻게 되건 나는 비겁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또 내가 극히 평범한 사람인 반면에 극히 정상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나 아닌 사람들을 내 문제에 개입시키고 구구한 억측을 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절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는 것 뿐이다. 나는 내가 성현군자이기를 바란 일도 없고 남이 나를 그렇게 보아 주기를 기대한 적도 없다. 나는 나대로 좋다. 독신주의를 고집하거나 남에게 강요하는 일은 없지만(물론 강요해서 될 일도 아니지만) 나는 내가 혼자 사는 사실에 커다란 긍지를 느끼지 않은 때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어떤 여성일지라도 가장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내게 있었으니까. 그런데 작년 가을 나는 처음 삶의 고독함을 느껴 보았다. 나이 탓이었을까? 그러나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작년 10월 가슴아픈 나날을 집에서 보내고 있을 무렵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감싸 주는 한 여성이 가까이 없었을 때 나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고독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던 사람은 종시 나를 찾아 주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면 결혼해도 좋을 것이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죽도록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생활의 한 방편으로 결혼하는 사람들을 나는 경멸한다. 그렇게 비겁한 사람들의 씨가 세상에 퍼지는 것을 또한 원치 아니한다.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들만이(그것도 절대로 일방적이어서는 안된다) 결혼을 할 자격이 있고 그렇게만 된다면 세계가 고민하는 인구폭발 문제도 간단히 해결이 되고 이 지구상에는 가장 우수하고 용감한 종족만이 퍼지게 될 것이다. 결혼한지 석 달도 못되었는데 벌써 딴 생각을 하고 서로 속이는 남녀는 도시 결혼할 자격도 없거니와 살려둘 만한 가치도 없는 존재들이다. 나는 독신으로 있는 상태만이, 죽도록 사랑하고 싶은 상대가 생길 때 죽도록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하기 때문에 독신을 아름답게 보는 것이다. 데데하고 지저분하게 10년, 20년, 30년을 사는 것보다는 깨끗하고 멋있게 한두 달 사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보람있지 않을까? 신부감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젊은 남자, 신랑감을 구하기에 혈안이 된 젊은 여자를 볼 때 한심한 생각이 앞선다. 오직 한 번 허락된 삶을 어쩌면 저렇게 낭비하려 드는가!
━ 이상적인 여인상
나는 앞서 여성의 생명은 아름다움에 있다고 하였고 그 아름다움은 진실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서 말하였다. 그런데 사람의 아름다움이란 노력없이 창조되지 않는 것이며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은 더욱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연전에 유명한 화장품 회사인 맥스팩토가 "당신도 또한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세계의 뭇여성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 훌륭한 표어를 가지고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고 하는데 곰곰히 생각하면 참 멋있는 말이다. 여자는 누구나 아름다울 수 있다. 자기가 남달리 아름답다고 의식하는 여성은 그만큼 그 아름다움을 깎아 먹는 것이지만 그 반면에 자기가 아름답지 않다고 체념하고 있는 여성은 가련하다 못해 초라하게 보이는 법이다. 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 어엿한 자세로 걸어가는 여자는 남자의 눈에 다 아름답게 보인다. 그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가 뜨겁게 사랑할 만한 남성이 생의 어느 시각에건 나타날 가능성이 많다.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대로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결혼이라는 제도는 조만간 무너지고 말 것이지만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훌륭한 남녀를 결합시킬 것이다. 동물적인 욕망과 충동만이 아니라 보다 승화된 본능의 훈풍 속에서 사랑하는 남녀는 서로 손을 잡고 껴안고 입을 맟출 것이다. 그 뒤의 일이 어떻게 될는지 분명히 내다보기는 어렵지만 금욕의 미덕을 전혀 지니지 못한 여성을 남성은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불길처럼 뜨거우면서도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 엷은 미소를 짓는 여자에게 남자는 자기의 가진 것을 다 바치고 세상 끝날까지 사랑을 퍼부을 것이다. 「예언자」를 쓴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사랑과 사랑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남겨 둘줄 아는 여성이 더욱 아름답다. 30살도 못되었으면서 얼굴을 화장하지 않고는 외출하지 못하는 여자는 어딘가 잘못된 여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의 젊음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는 여성에게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바랄 수 있을 것인가! 젊음은 그대로 버려 두어도 아름다운 것, 손질을 하는 것이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해칠 우려가 있다. 꾸밈없는 젊음, 또 늙은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의젓한 중년에게서 남자는 삶의 환희와 보람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끝으로 이 땅의 젊은 여성들에게 특별히 한마디 일러 두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자기의 조국의 현실이나 운명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거나 감각이 없는 여성을 사랑하지도 않고 아름답게 여기지도 않는다. 동족의 고통과 시련을 외면하는 사람은 남녀를 막론하고 자기의 행복의 입지 조건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 것인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행복을 꾸려나갈 기본자세를 가다듬지 못한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여성들이 정치 문화 경제 등 좀 더 차원 높은 시민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지 않으면 도저히 우리의 민주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우리 여성들의 참정권은 여지없이 낭비되고 있는 실정이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의식이 박약하거나 결여된 여성은 여성의 생명인 아름다움을 오래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와 자기 이외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여성이 자기의 좌표를 정확하게 파악한 여성은 아니지 않은가. 자기의 좌표를 찾지 못한 여성은 곧 권태로워질 것이다. '지성의 미'를 풍기는 여성만이 참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여성은 아름답다. 괴테가「파우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비의 합창"이란 이름으로 읊은 시 한 귀절을 가지고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모든 지나가는 것들은 오직 그 모습 뿐이니라. 채우지 못한 것 이에 채워지고 이름 짓기 힘든 것 이에 성취되나니, 영원히 여성이라는 것, 우리를 매혹하도다.
영원히 우리 남사들을 매혹시키는, 여성이라는 이름의 신비로운 존재 위에 영광과 존귀가 있기를 축원한다.
⑤ ━ " 사랑에 실패했을 때 "
사랑을 두고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보내는 사랑의 신호에 대해서 상대방의 비슷한 답신이 있으면 성공이고 없으면 실패라는 매우 간단한 해석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돌아오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받을 것을 기대하고 보내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장터에서의 흥정이다. 사랑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 배냇병신인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구걸하는 저 어머니의 사랑은 보상이나 칭찬을 염두에 두지도 않는 어쩔 수 없는 사랑이다. 이 병신아이가, 사랑하지 않는 수많은 행인들에게는 동전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한심한 생명이지만, 사랑하는 그의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천금 만금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귀한 보물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말해서 사랑이야말로 엉뚱하고 종잡을 수 없는 모순의 덩어리이다. 크게 보면 사랑은 인류와 우주의 조화나 발전을 꾀하는 하늘의 뜻을 성취하려는 신비스런 의지의 표현이다. 일본의 어떤 불교사원은 그 건축 구조상의 오묘한 비밀이 하나 있는데, 이 건물의 어느 못 하나를 빼어 버리면 이 집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사랑은 흡사 이 비밀의 못 하나와도 같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법이 있고 경찰이 있고 군대가 있어서 인간사회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사는 사회의 평화적 바탕이나 발전의 원동력은 여기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랑이 창조적 에너지라는 사실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이란 그렇게 크고 놀라운 것이기에 실패나 좌절이 문제가 안된다는 말이다. 단테는 사랑에 성공한 사람인가, 실패한 사람인가? 통속적인 관념에서 본다면, 베이트리체는 단테의 속만 태웠을 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서 젊은 나이에 저승으로 갔으니, 그의 사랑은 물론 영영 돌아오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만일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 딸 낳아 단란하게 살았다면, 결코「신생(新生)」이나「신곡(神曲)」과 같은 걸작을 그가 세상에 남기지는 못했으리라 짐작한다. 그의 위대한 작품들을 대할 때 사랑의 승전가를 듣는 느낌이다. 단테는 사랑에 성공한 사람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즐겨 묘사하는 작품의 주인공 한 사람은 배신에 가까운 행동을 거듭하는 애인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추구하는 비극적 삶으로 일관한다. 그의 애인은 결과가 뻔한 철없는 모험을 되풀이하는 중 순전히 생활의 안정을 얻기 위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시집가는 추태를 부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일일이 따라다니며 그녀의 뒷바라지를 정성스럽게 하고 또 하는 이 사나이가 때로는 한심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 주인공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랑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다. 어찌 생각하면, 세속적 안목으로 볼 때에는 실패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요즈음의 세태는 너무도 험악해서,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고 투쟁이고 파괴고 독선이고 때로는 기만이다. 원시시대에도 이렇지는 않았다. 인간의 타고난 잔인성에다 산업 사회의 교활함마저 가미되어 사랑은 폭력의 동의어처럼 되어 버린 감도 없지 아니하다. 어떤 기관에 방위병으로 근무하는 젊은 놈이 마산의 어느 여교사를 짝사랑하다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다방에 앉은 그녀를 일곱 번 여덟 번 칼로 찔러 죽여 버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자는 필경 사랑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신분열증의 발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개인이나 사회가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그런 불행은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농촌에서 미친 사람보다 도시에서 미친 사람이 더 잔인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요새 세상에서는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이 즐겁게 들리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불길하게 마저 생각되니 어찌된 일일까?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 어울려 살면서 아들 딸 낳아 곱게 키우는 일은 매우 아름답고 보람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모든 참 사랑이 다 참 사랑으로 응답되는 것이 아니므로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산다는 일은 상당히 어렵고 드문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도 없이 결혼부터 하는 사람을 나는 장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사랑을 죽는 날까지 주고 또 주는 사랑의 고달픈 삶은 사랑에 성공한 사람의 편한 일생보다 몇 곱절 더 아름답고 보람있게 느껴진다. 그런 사랑의 대상이 우리에게 없는 것만이 유감스러울 뿐이지, 만일 그런 대상이 있기만 하다면 성공과 실패를 따질 것없이 가슴이 벅차고 감격스럽기만 하겠다. 참 사랑에는 패배가 없다.
【 & 김 동 길(金 東 吉)/『 절망과 좌절에 대하여 』... 】
B 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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