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 " 순종한다는 것 "
< 수험생에게 보내는 말 >
시험이라는 것은 무섭다. 내가 무섭다고 하는 것은, 합격이냐 불합격이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시험만큼 인간을 자기 본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부모도, 형제도, 선생도, 학급 친구도, 그 밖의 모든 것이 자기의 시험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조금만 무슨 소리가 나도, "시끄럽다.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된다!" 라고 소리 질러 대기 일쑤이다. '누가 어떤 이유로 낸 소리일까' 하고 생각해 보는 여유 따위는 없다. 그것이 자기를 위해 야식(夜食)을 만들던 어머니가 떨어뜨린 도마에서 난 소리라 할지라도, '아아, 이렇게 밤 늦도록 어머니는 나에게 마음을 써 주고 계시는구나!' 하고 감사하는 일은 없다. 이와 같이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 되어, 이 세상은 몽땅 자기의 시험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착각하게 될 때에,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시험은 무섭다"고 한 것은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진학할 능력이 있어도, 가정 사정 때문에 진학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또 진학을 하려고 해도,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다. 지금 시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라는 것을 몸에 스미도록 느껴 주었으면 한다. 그 감사가 도리어 마음의 여유가 되고 힘이 된다. "천재는 노력자의 발명이다." 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어떤 음악가로부터 "재능이란 엄한 훈련에 견딜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 말에 감명을 받았다. '엄한 훈련에 견딜 수 있는 마음'이란, 시험 공부로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순종이란, 남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여서 "예"하며 따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순종이란 진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멋대로인 감정을 스스로 자제하고 진리를 따르기로 뜻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엄한 훈련에 견뎌 낼 수 있는 마음이란, 절대로 막무가내로 자기만을 주장하는 고집스런 마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믿는다. 참으로 진리에 대하여 겸손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한다 해도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잃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모쪼록, 이 음악가가 "재능은 엄한 훈련에 견딜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한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간직해 주었으면 한다. 그 음악가가 겪은 엄한 훈련은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16) ━ " 사랑의 깊이의 발로 "
< 예 의 >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만약 예의 바른 순으로 한 줄로 선다고 하면, 부끄럽게도 나는 맨 꼴찌에 우두커니 서야 할 것이다. 나는 더운 때에는, 집 안에서 보자기를 엉성하니 몸에 걸치고 있는 인간이다. 이렇게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인간이 예의에 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젠 10년도 더 되었지만, 우리 집에는 해마다 도꾜에서 찾아오시는 '오챠' 선생이 계시다. 이 분은 다도계(茶道界)뿐만 아니라 정물(靜物)과 족자 분야에서 일본 제일이라고 일컬어지며, 해마다 전국에서 다도 선생들이 4천명 정도씩이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상경한다고 한다. 대단한 분이다. 이 분은 기독교의 전도사이기도 하여서 차(茶)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우리 집이지만 매년 오셔서 머물러 주시는데, 처음 오셨을 때에는 나는 몹시 당황했었다. 우리 집에 족자라고는 길다란 것 하나뿐이었다. 10년을 하루같이 성경 말씀이 기록된 그 족자 하나만을 걸어 놓고 사는, 풍취를 모르는 사람이다. 더욱이 다도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렇게 훌륭한 분에게 때를 따라 차를 올릴 재주도 없었다. 이거 큰일났구나 싶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내가 내놓은 차를 아주 자연스럽게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아, 이것이 도(道)를 통달한 사람의 모습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 일로 해서 내 마음도 아주 가벼워졌다. 차를 벌컥벌컥 마시는 다도의 권위자 앞에서는, 어떻게 꾸며 본다 한들 소용이 없다. 나처럼 다도를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 이것이 예의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닐까? 즉 그것은 절대로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고, 겸손과 상대방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예의란 '동정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남한테 인사를 하는 것도, 또 앞에 말한 선생처럼 상대방을 옹색하게 만들지 않는 것도 결국은 '동정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동정'을 '사랑'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사랑이 있는 사람의 언동은 예의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사방으로 연신 머리를 숙이는 것만이 예의라고는 할 수가 없다. 정중한 말씨만이 예의는 아니다. 상대방을 향한 눈길에 사랑에 찬 동정이 서려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백 번 머리를 숙이는 것보다 더 예의에 맞는 일일 것이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무례하게 행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이 있다. 이 13장을 '사랑의 장(章)'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조금 인용해 보기로 하자.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아니하나..."
이 '사랑'이라고 하는 말을, 지금 시험적으로 '예의바른 사람'이란 말과 바꾸어 놓아 보기로 하자. 그렇게 하면,
"예의바른 사람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예의바른 사람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예의바른 사람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 예의바른 사람은 결코 시들지 아니하나..."
라고 된다. 참으로 예의바르다는 것은 이렇게 되는 것을 가르친다고 생각한다. 자기보다 가난한 자나, 능력이 없는 자 또는 몸이 약한 자를 얕잡아 본다든가, 자기만 좋으면 된다고 자기 이익에만 급급해서 공해물을 함부로 버린다든지, 남의 욕만 한다든지, 남의 아내나 남의 남편과 연애를 한다든지, 금세 화를 내어서 남을 저주한다든지 "절망이다, 절망이야" 하면서 낙담한다든가 하는 사람은, 아무리 말씨가 정중하여 인사치레를 곧잘 하고 복장도 단정하다 하여도, 그것은 예의바른 사람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한다. 예의란 사랑의 깊이가 자연히 밖으로 드러난 것일 것이다. 물론 그 나타나는 양태는 개성에 따라 또는 때와 장소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전도사인 그 차(茶) 선생이 다도계의 제 일인자가 된 것도 이유 없다고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나와 같은 무례한 자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것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17) ━ " 사회에 미치는 교양 "
10년쯤 전, 어느 외국 선교사 부인에게서 들은 자녀들에 대한 훈련법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매일 식탁에 내는 음식물은, 주식이든 부식이든 모두 큰 접시에 그리고 큰 그릇에 수북히 담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은 자기 것을 각각 작은 접시에 덜어 먹는다는 것이다. '겨우 그런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나에게는 무척 농도 짙게 마음에 와닿은 훈련법이었다. 일본에서도 이와 같은 훈련법을 사용하는 가정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 자신은 무 반찬도, 콩도, 어김없이 접시나 그릇에 미리 담아 놓은 식탁만 대하면서 자랐다. 나에게 주어진 내 것을 남기지 않고 먹으면 되었다. "남겨선 안 된다." "쏟아선 안 된다." 하는 두 가지가 식사 때의 규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큰 접시에서 덜어 먹는 식사법에서는, 자기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일지라도, 먼저 전체의 인원수를 생각하면서 자기의 접시에 덜어 담아야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빵이든 샐러드이든, 가족 전체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없다. "야, 너는 너무 많이 펐다." 등으로 형제간의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먼저 남을 생각하고, 전체 속의 한 사람으로서의 자기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훈련을, 매일의 식사 과정에서 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이것은 이른바 '전체주의' 따위와는 다르다. 각자가 서로 남을 돌아보는 것이다.) 더욱이 이런 훈련이 식탁이라고 하는, 본능이 드러나기 쉬운 식탁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그런 훈련은 얼마나 남을 생각하는 인간성을 키우게 되는지 모른다. 세 번 정도만이라도 이런 훈련을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의 정신생활은 많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인간이 성장하여 어른이 된 후 기업가가 되었다고 하자. 아마 한 사람은 공장을 설치하는 데 있어서도, 먼저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에 불편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며 폐수와 매연 처리를 제1의 조건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사회의 문제보다도 먼저 어떻게 해야 자기의 이익을 많이 올릴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상상해 보았다. 겨우 식사 훈련 한 가지로 그렇게 다른 인간이 만들어질 수 있겠느냐고 사람들은 웃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의 일은 곧 만사(萬事)'라고들 하지 않는가? 식탁에서 이와 같은 훈련을 하는 부모는, 다른 면에서도 또 어김없이 같은 훈련을 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예의 선교사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은 세 살이 되면 용돈을 주기로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용돈의 십일조를 우선 교회에 드리고 있습니다." 세 살 때부터 받은 용돈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얼마나 그 훈련이 훌륭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들 주위에 용돈의 10분의 1을 사회의 무엇엔가에 바치는 훈련을 시키는 부모가 있을까? 어쨌거나 훈련 여하가 그 인간을 어떤 모양으로도 바꾸어서, 그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18) ━ " 꿈 속의 모자상(母子像) "
< 엄마와 젖먹이와의 대화 >
엄마와 아이가 즐겁게 대화하고 있는 정경만큼 맑고 아름다운 것도 드물다. 곧잘 젖먹이를 업은 젊은 엄마가 그 아이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하면서 걷는 모습을 보게 된다. 주의해서 살펴보면, 아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기분 좋게 쫑알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대해서 엄마는, "오오, 우리 아가, 좋은 아가다." "그래 그 다음은?" 등으로 맞장구를 치고 있다. 아이는 뭐가 우스운지, 가끔 깔깔대며 웃기도 하면서, 그 '천사의 말'로 엄마와 대화를 계속해 간다. 이 대화에는 뜻은 없을는지 몰라도 마음의 교류는 있다. 그리고 마음의 교류가 있는 한, 훌륭한 대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멀잖아 아이가 사춘기에라도 접어들게 되면, 때때로 이 마음의 교류가 끊어져 버리곤 한다. 어디에 갔다 돌아와도 "지금 돌아왔습니다"라는 인사도 않고 훌쩍 자기 방으로 들어가, 거기에 틀어박혀 버린다. 그런가 하면, 또 말 한 마디도 없이 훌쩍 집을 나가 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부모와 자식의 대화는 끊어진다. 저 어린 시절의 엄마와의 마음의 교류는, 언제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모른다.
< 자기 전의 엄마와 아이의 대화 >
요사이는 맞벌이 부부가 늘어서, 어머니들도 아이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없다. 아동 심리학자인 '시나가와 다카코'라고 하는 분은 이렇게 분주한 부모들에게 밤에 자기 전 한때에 아이들과 단 5분 동안이라도 이야기하도록 하라고 부탁하고 있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의 아이는 몹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자기가 말하는 것보다 아직은 듣고 싶어하는 때가 아닌가 한다. 나는 요사이「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석간에「장난감 집짓기 상자」라고 하는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그 안에는 마음의 교류가 없는 부모자식과 또 그와 반대로 늘 마음이 잘 통하고 있는 부모 자식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소설 속에서 마음이 통하고 있는 부모와 자식은, 잡화점을 경영하는 홀어머니와 외아들인 이른바 모자가족이다. 늘 분주한 이 어머니는, 밤에 자기 전 한때 국민학교 1학년인 아들과 대화하기로 정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인 가즈오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아, 자기가 지은 동화를 들려 주는 것이다. 현실과 동화의 세계를 아직 분별할 수 없는 가즈오는, 어머니의 동화 속에 나오는 가즈오가 자기라고 착각한다. 그것은 강한 암시력을 가진 하나의 교육 방법이다. 가즈오는 현명하고 인자한 어머니와의 대화 속에서, 마음이 아름답고 유순한 성격으로 자라게 된다. 동화를 통해서 아이는 온순하게 아무런 저항도 없이 중요한 교훈을 터득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맞대 놓고 저것은 하면 안 된다, 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저렇게 해라, 이렇게 해라 하는 식으로 주의를 주면 반발하던 아이도, 이처럼 동화를 통해서 하게 되면 의외로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공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애독자로부터의 공감한다는 편지 >
며칠 전, 내 소설의 애독자한테서 편지가 왔다. 그 사람은 오사카에 있는 '후나타'라고 하는 총명한 어머니이다. 그녀는 편지에서 내 소설 속의 모자상(母子像)에 공감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가즈오 군의 천국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저의 집 아이들의 어렸을 적 생각이 떠오릅니다. (중략) 아이가 뭔가에 부딪쳐서 소리 높여 울 때에, 제가 느낀 것은 '아파, 아파!' 하는 응석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울고 있는 아이가 아프다고 어루만지는 부분에서, 무엇인가를 떼어 던지는 듯한 큰 몸짓으로 '아파, 아파야, 멀리멀리 날아가 버려라!' 하는 말과 함께 공을 던지는 시늉을 해 보이는 것으로 한 막(幕)을 내리곤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아이는 '아파, 아파'의 여행이라고 하는, 제멋대로의 이야기를 밤마다 자기 전에 해 달라고 조르게 되었습니다. 밖으로 던져진 '아파, 아파'가 참새나 비행기에 부딪히면서도 울지 않고, 용감하게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며 차례차례 여러 친구들을 만들어 세계 여행을 한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계속해도 화제가 끊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후략)
편지는 그 '아파, 아파'를 아이가 대단한 애정을 가지고 그림에 그리기까지 했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나 자신은 아이가 없지만, 국민학교 교사 노릇을 7년이나 했으며, 그동안 세 번이나 1학년의 담임 노릇을 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겐 아무래도 관심이 있다. '어머니와 아이의 밤 한때, 이 얼마나 소중한 일일까' 하고 후나타 부인의 편지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 옛 동화를 >
누군가가 요즘의 젊은 어머니는, 아이에게 들려 줄 동화도 알지 못하는가 하면, 자장가마저도 모르고 있다고 쓰고 있었다. '아무려면 그렇기까지야 하겠는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몇백 년 되는 옛날부터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야기하고, 아들이 손자에게 전해 온 무형 문화재인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이, 벌써 끝장이 나 버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머니들의 창작 동화와 함께 오랜 세월 구전되어 온 옛이야기도, 자녀들에게 들려 주었으면 한다. 아무튼 나의 꿈 속의 모자상은, 어머니와 아이가 마음으로부터 즐거워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 & 미우라 아야꼬/『 고독에도 손길이 』... 】
Bible Believer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