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6. 23. 23:41

하나님 손에 이끌린 종교개혁 - 마틴 루터

      
[ 역사를 움직인 기도 - 세계편④ ]

 

 

  하나님 손에 이끌린 종교개혁 - 마틴 루터

“개혁은 내가 한 것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

하루 3시간 이상 기도,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직업소명관과 사유재산제로 자본주의 토대 구축
 

초기 독일어 번역본 성경의 모습, 마틴루터는 기독교 성경을 알기 쉽게 문답식으로 정리했다. 

“사탄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수도사들이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궁지에 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뿐이다.”

이 기도문은 종교개혁 당시 강력한 개혁 반대파들이 온 힘을 합하여 개혁파의 신앙을 뒤집으려 했을 때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했던 기도이다.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의 기도에서 나왔다. 루터는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했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한스 루터는 엄격한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자식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교양 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자신의 삶과 구원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가 왜 성직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는지 알려주는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만년에 쓴 <식탁담화·Tischreden>에는 1505년 7월 2일 루터가 친구와 함께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도중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게 된 것으로 적혀 있다. 이 때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루터는 불안과 번민에 휩싸였으며 구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가 되어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서 중세교회가 제시한 고해성사나 신비주의적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부정하게 된다. 절망적으로 구원을 구하던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루터는 “즉시 다시 태어나서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 바로 그 자체에 들어온 느낌을 스스로 가졌다”고 말했다.

신약 독일어번역 통해 독일통일 기여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과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결과로 14세기경부터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죄를 완전히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결심으로 고백할 때,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죄의 벌은 남게 되므로 그것을 기도나 선업(善業)으로 갚을 것을 권했다.

가톨릭교회는 성당건설과 포교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헌금을 권하면서 면죄부(免罪符) 발행을 남용하여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루터는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종교개혁에 앞장선 마틴루터의 모습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이를 불태워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당시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에 의해서나 아니면 분명한 이성에 의해 나를 설복시키지 않는다면,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제국의 권위에 대한 역사적인 양심선언이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에서 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큰 공헌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철저히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의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영주(領主)들 간의 분쟁 조정을 위해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소천(召天)하였다.(1546년)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으로 응답해야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해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소명을 받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기독교인은 모두가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루터에 의해 개신교에서는 새로운 소명관(召命觀), 즉 직업관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직업 소명설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일부 재세례파(再洗禮派)가 주장하던 공유재산제도를 비판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했다. 루터는 상업활동을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기독교적 방식으로 실시될 수 있다고 봤다.

루터의 이러한 사상은 이후 칼빈(Jean Calvin)과 칼빈주의자들을 거쳐 근대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또 구걸을 금지시키고 가난한 자들을 제도적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어린이들에 대한 무상교육을 주장했다. 특히 공중도서관을 세우되 거기에는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고전과 희랍, 로마의 고전, 법률, 의학, 예술, 역사서적의 비치도 주장했다. 루터는 스스로 과학의 발전과 기계의 발명에 감탄을 보냈다.

우리는 루터를 말할 때 당연히 ‘종교개혁자’라는 칭호를 붙인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스스로를 ‘개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에 이끌려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개혁’은 오로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은 “개혁!”의 구호만을 외쳤다. 그러나 우리가 루터에게서 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였다. 면죄부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탁상담화와 편지에서 밝혔다. “이 일에 나는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왔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던졌습니다.”

루터가 살았던 15세기에는 종교개혁과 함께 르네상스가 일어났던 때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일 뿐이어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역사를 움직였다. 그러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