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6. 23. 23:45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의 주역 - 조나단 에드워즈

      
[ 역사를 움직인 기도세계편(5) ]

 

18세기 초 뉴욕에서 술 제조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던 막스 슐츠라는 사람과 동시대 인물로서 당시 미국전역을 휩쓴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의 주역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1703~1758)의 후손들의 직업을 컴퓨터로 통계를 냈다. 전자(前者)의 후손들은 무기수, 암살범, 마약범, 창녀, 자살자 따위로 분류되는 반면 에드워즈의 후손들은 부통령, 문학가, 선교사, 목사, 대학총장 등으로 분류됐다고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 정부홍 著)
 
조나단 에드워즈

미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자 이자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 주 이스트윈저(East Winsor)에서 회중교회(會衆敎會)목사 티모시 에드워즈(Timothy Edwards)의 11명의 자녀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났다. 티모시 에드워즈의 독실한 청교도 정신은 아들인 조나단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조나단에게 매일의 성경 묵상과 기도의 필요성, 시간의 소중함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6살에 라틴어를 공부했으며 13살이 되서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특히 그는 어린시절부터 매일 다섯 차례씩 은밀한 기도를 드렸다.

에드워즈는 12살에 예일대에 입학해 17세가 되기 전인 1720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목회 사역을 스스로 준비하기 위해 대학 강사로서 2년간 더 머물렀다. 이 기간 중 어느 날 디모데후서 1장 7절을 읽은 후 진정으로 회심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디후 1장7절)

그는 회심 체험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 말씀을 읽었을 때 무엇인가가 내 영혼을 파고 들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나는 전에 없던 태도로 구원 얻기를 간구하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익을 얻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포기 할 마음이 있음을 느꼈다. 나의 마음은 많은 감동적인 사상과 영적 투쟁으로 계속 가득 찼다.”

회심을 체험한 에드워즈는 영적*지적 준비를 마치고 비로소 사역을 시작 할 수 있었다. 그는 불과 19세의 나이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설교사 자격을 얻게 되었다. 1727년 2월 15일 스물세 살의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은 에드워즈는 당시 널리 존경을 받았던 그의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목사 로부터 매사추세츠주 노스햄프턴(North Hampton)교구를 물려받은 후 본격적인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이곳에서 그는 1727년 7월 뉴헤이븐에서 사역하는 목사의 장녀인 사라 피어폰트(Sarah Pierpont)와 결혼 하게 된다.

에드워즈가 사역을 하던 18세기 초반의 미국은 복음주의로 하나가 되었던 전세기 청교도들의 시대와는 상황이 달랐다. 청교도 이주자들의 첫 세대를 지도하였던 영적 거성들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물질적 번영이 미국인들의 영적관심을 빼앗아가 버렸다.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도덕성은 경건성과 아울러 혼미해졌으며, 오랫동안 행해 왔던 은밀한 기도, 각종집회, 주일성수가 사라진 시대였다. 교회의 출석률은 떨어졌으며 많은 이들이 열등감과 자포자기에 쌓여 있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인디언 전쟁이 발발하자 엄청난 숫자의 청년들이 희생되어 식민지의 영적 상태는 회복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당시의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성취만을 강조하는 신앙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거듭 강조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구원을 받으라는 순수한 복음적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에드워즈는 하루 열두 시간 성경을 연구하면서 충실한 목회를 했다. 그의 설교는 두 시간 이상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고함치며 설교하지 않았고 충실한 성경주석을 기초로 특유의 청교도적 적용이 있는 교리적 해설을 제시했다. 그의 간절한 열정으로 말미암아 1734년에서 3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동안 그의 교구에서 300여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거리에서는 술집에 인적이 끊기고, 사람들이 에드워즈의 설교를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게 됐다. 꼭 200가구로 구성된 노스햄프턴의 전체 주민이 중생(重生)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역사는 실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

1735년 봄에는 부흥이 뉴햄프셔 주의 여러 마을과 시골로 번져갔다. 당시 에드워즈는 이에 대해 “거의 모든 가정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 뚜렷한 증거들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기독교 부흥운동은 5년 동안 지속됐으며 다른 여러 지방에 파급됐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 1734~1744)`이다.

특히 조지 휘필드(George Whitefield)는 1739년 미국으로 건너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도와 각지에서 설교를 함으로써 교파를 초월하여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신앙이 활기를 불어넣었다. 대각성 운동으로 인해 뉴잉글랜드에서만 짧은 기간동안 5만 명 이상이 회심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게 됐다. 대각성 운동은 유럽과 영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루터교가 되살아났고,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주도한 영국의 기독교 부흥운동으로 감리교가 생겨났다. 1791년 웨슬리가 서거하였을 때의 교세는 영국 전역으로 확장, 잉글랜드를 본거지로 하였던 감리회 부흥운동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이르렀다.

대각성 운동을 통해 교회가 발전했고 영혼 구원을 목회의 가장 으뜸으로 삼게 되었다. 대각성운동 이후 미국사회는 절제, 여성해방, 해외선교 등 여러 분야에서 도덕적이고 박애적인 개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한편 프린스턴, 다트머스, 브라운, 러트거즈와 같은 수 많은 대학과 신학교가 세워졌으며 선교협회가 조직됐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년에 총장으로 재직했던 프린스턴 대학의 전경

대각성운동의 가장 큰 기여는 미국인들에게 일체감을 제공한데 있다. 이제 교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심한 기독교인이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로인해 각 교파의 연대감이 깊어져 식민지 각 주간의 이해를 촉진시켰고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이 독립전쟁(1775~1783)에서 식민주가 단결하여 승리를 얻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1750년 12월 초 인디언들이 사는 곳인 스탁브리지(Stock Bridge)에 있는 한 교회에서 6년간 인디언 선교를 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딸과 약혼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1718~1747)와 함께 사역했는데, 브레이너드는 인디언 사역중 병을 얻어 29세의 나이에 임종했다. 에드워즈는 사위가 죽자 일부 자료를 첨가하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David Brainerd by Jonathan Edwards)"를 출판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18세기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와 헨리마틴(Henry Martin)이 회심하여 인도를 가게됐다. 또한 로버트 맥케인(Robert M. McCheyne)이 선교를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등 수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해외로 향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758년 에드워즈는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에 취임했으나 천연두 백신(Vaccine) 주사의 후유증으로 인해 그해 3월 22일 소천(召天)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의지 하시오. 여러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소.”

조나단 에드워즈는 죽었으나 그가 미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그가 뿌려놓은 복음주의의 씨앗은 ‘제2차 대각성운동(The Second Great Awakening)’으로 이어졌다. 특히 18세기 말엽 미국 뉴잉글랜드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손자인 티모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가 1795년 예일대 총장이 되면서 예일 대학교 학생들 가운데 신앙의 각성이 일어나가 시작했다. 드와이트의 도전적인 설교가 학생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하여 1802년에는 전교 학생의 1/3이 공중 앞에서 회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

이와 같은 집회는 급격하게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1799년 켄터키 주의 케인 릿지(Cane Ridge)에서 일어난 대 부흥운동은 이후 테네시, 서부 캐롤라이나, 조지아, 오하이오 주까지 계속하여 미국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감리교의 경우 1784년에 15,000명이었던 신자가 1850년에는 100만을 넘어섰으며 침례교의 경우 1800년 신도수가10만 명에서 1850년이 되자 80만이 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현재 미국전체인구의 47%인 1억 7,000 만 명이 일주일에 한번 이상 교회에 출석해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서유럽의 20%, 동유럽의 14%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은 것이다. 갤럽 여론조사에 의하면 오늘날 미국인 10명중 4명이 자신들을 ‘복음주의적 기독교인’ 또는 ‘중생체험 기독교인’이라고 인정한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미국 기독교의 복음주의의 영향력은 현재 미국의 문화 및 정치부문에서 지배적인 종교 세력이 되었다. 캘리포니아주 에스콘디도에 있는 웨스턴민스터 신학대학의 대럴 하트 교수는 미국 정치에서 개신교의 지원이 없는 공화당은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특히 보수 개신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공화당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세력으로 굳게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신교의 정치적 영향력을 드러내는 상황들은 이외에도 많다. 남부의 보수적 개신교단은 지난 1979년 모럴 머저리티(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라는 종교적 권리 옹호단체를 만들어 정치적 세력화를 시도했다. 대통령선거와 주정부, 로컬 정부의 각종 선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모럴 머저리티는 1989년 크리스찬 코울리션(기독교인 연합:Christian Coalition)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이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현실정치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90년대 크리스찬 코울리션 조직을 이끌었던 랠프 리드는 주요 미디어에 나가 1천5백만표 이상의 투표력을 바탕으로 대통령과 각종 선출직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교단과 교인들이 원하는 정책과 문제해결책을 제시했다.

현재 크리스찬 코울리션 회장을 맡고 있는 로버타 콤스는 종교인으로 볼때 정치는 결코 더럽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정치는 일상생활이고 이것을 통해 법률이 만들어지고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 정치판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734년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 일어난 기독교 부흥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영적 대각성 운동에 뜻있는 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은 한결같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서를 읽고 회심하여 국가와 세계 교회들의 부흥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