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절대성을 수호한 영국의 목회자-찰스 H. 스펄전
[ 역사를 움직인 기도 14. ]
하나님의 절대성을 수호한 영국의 목회자-찰스 H. 스펄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성도여, 그대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대양(大洋)을 다 마셔 비울 때까지 혹은 높이 치솟은 전능하신 그 능력의 산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놓을 때까지, 그대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은 하나님의 힘(능력)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지구를 그 궤도에서 돌게 하시는 바로 그 같으신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매일매일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Morning by Morning : meditation for daily living*찰스 H. 스펄전著)
신앙심 깊은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찰스 H. 스펄전(Charles H. Spurgeon*1834~1892)은 영국의 에섹스(Esex) 켈비던(Cheveldon)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면서 영국은 사회의 안정과 인구 증가, 철도의 발달, 해외식민지 건설등 국가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한편 뉴턴의 과학주의, 로크의 합리주의 등 신사조가 등장했으며 다윈의 진화론과 성경에 대한 잘못된 비평 등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찰스 스펄전은 이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도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수했다.
찰스 스펄전 목사
스펄전은 청교도 신앙으로 무장한 복음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성경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는 신앙심 깊은 부모 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자주 무릎을 꿇고 스펄전을 품에 꼭 안아서 기도하곤 했다. 이와 같은 가정환경 하에서 스펄전은 어릴 때부터 성경을 포함해 수많은 기독교 관련 서적을 읽어 나갔다. 1849년 여름 스펄전은 뉴마켓(New market)에 위치한 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이곳에서 늘 내적 갈등과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다. 번민의 밤이 지나고 아침에 깨어나면 청교도 서적을 집어 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의 고민은 다름 아닌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50년 1월 스펄전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교회를 가게 됐다. 그러나 이날은 심한 눈으로 인해 목사가 오지 못하고 대신 어느 구두 수선공이 말씀을 전하게 됐다. 말씀은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였다. 구두 수선공은 이날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보는 것은 고통이 따르지 않습니다. 손과 발을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은 ‘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윽고 그는 스펄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젊은이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당신이 할 일은 예수를 바라보며 사는 것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스펄전은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했다. 그는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되새겼다. “나는 용서받았습니다. 한량없는 은총이요! 죄인이 주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 나의 영혼은 쇠사슬이 끊기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자유로워진 영혼이요, 천국의 상속자이며 용서받은 자요,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나는 더러운 진흙과 끔찍한 지옥으로부터 건져올림을 받았고 나의 발은 단단한 바위위에 서 있으며 나의 앞길도 탄탄히 다져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17세 때 침례교회 목사가 됨
그는 이와 같은 고백을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했고 그동안이 고통과 괴로움은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씻기었다. 그는 즉시 세례를 받고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그가 겪었던 이러한 영적 체험은 지속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죄의 사악함에 대한 인식은 그의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져서 그로 하여금 경건한 모든 것을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한 모습처럼 복음을 가장 진실 되고 직접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게 됐다.
1851년 10월 스펄전은 17세의 나이에 워터비치(Waterbeach) 마을의 침례교회에서 정식 목사가 되었다. 이 시기 조지 골드라는 사람이 캠브리지 회합에 참가했다가 우연히 ‘소년 설교자’(The Young Soul-Winner)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런던의 뉴 파크 스트리트 침례교회(New Park Street Congregation)에 그를 추천했다. 스펄전은 1853년 12월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설교를 위해 런던에 도착했다. 그는 그 교회의 크기에 압도당했으며 다른 목사들에 초라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엄청난 압박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날 설교를 워터비치의 시골 청중들에게 했던 설교와 똑같이 했다.
그는 단지 말씀을 말씀으로 영접하고 그대로 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단했다. 예배는 너무나 엄숙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씀을 들은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고 아침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들은 오후 예배에 다른 사람들을 초청해 함께 참석했다. 저녁 예배 때의 회중은 더 많았다.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집사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던 스펄전에게 목사가 되어 달라는 청탁을 하기도 했다. 1854년 2월 19세의 스펄전이 이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자 교회는 증축공사를 할 정도로 성도가 늘어났다.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을 배치했지만 군중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때문에 교회 측은 스펄전에게 더 넓은 음악회장을 구해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설교가 있던 날은 그 곳의 교통이 마비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하는 일이 아무 의미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전력했다. 그의 설교는 다음과 같았다. 그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 골방에서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가지며 복음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늘 단상 앞에 서서 진실한 기도로 회중을 이끌었다. “이제 당신의 종은 가장 신실한 모습으로 가장 뜨거운 가슴으로 그의 구세주에 대한 사랑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며 다시 한 번 축복된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을 전파하고자 합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스펄젼에게는 설교중 회중을 웃고 울게 하는 탁월한 기질이 있었다. 그는 모노드라마의 천재처럼 자연스러운 몸짓과 적절한 일화를 들어 그가 전하는 복음의 주제에 회중을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열정과 영혼을 토하며 예수님을 증거 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죄는 장벽이 될 수 없습니다. 그대의 죄는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가 사단과 같이 검을지라도, 죄와 친구일지라도, 이 밤에 믿기만 한다면 모든 죄가 용서 받을 것이며 모든 악이 없어질 것이며, 모든 불경스러움이 씻어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는 늘 예배의 종반부에 가서는 피곤에 지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끝까지 이끌었다.
생전에 모진 탄압 받기도 해
그러나 스펄전은 성직수여식도 받지 않았고 대학을 나오지 않은 탓에 주위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외에도 1856년 어느 날 그가 음악회장에서 설교를 하던 중 어느 괴한이 갑자기 불이 났다고 고함을 질렀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이 운집한 음악회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으며 수십 명의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발에 밟혀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그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이룩할 수 없다는 청교도 사상을 절박하게 믿었을 때 그에게 무수한 시련이 다가왔다. 그러나 당시 각 기독교 종파들이 세상과 타협하고 그에게 압박을 가해 왔을 때에도 스펄전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최후의 청교도’ 처럼 억척스럽게 싸워나갔다.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1861년 스펄전은 10,000명 이상이 모이는 메트로폴리탄의 테버네클 교회를 세우게 된다. 또 목회자 훈련학교인 페스터즈 칼리지(Pastors College)를 세워 순수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했다. 스펄젼은 이 대학의 학생 전원을 1:1로 상담하면서 그들의 영적 성장을 도와주었다. 1866년 런던에서만 그의 제자들이 세운 교회가 18개나 되었다. 그는 또 `The Sword and the Trowel`(검과 삽) 월간 잡지와 1,900편 이상의 설교문들과 시편 주석 등도 발간했다.
그러나 늘 허약했던 스펄전은 1892년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Mentone에서 소천(召天) 했다. 당시 그의 비서였던 해럴드(J.W. Harrald)는 이 사실을 급히 런던의 전했다. 이윽고 월요일 아침 영국의 신문들은 전면을 스펄전의 죽음으로 채웠다. 실제로 이날 만들어진 대부분의 신문들이 삽시간에 팔린 사실은 매우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찰스 스펄젼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복음의 설교자였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못 박히심을 전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그의 모든 재능을 바쳤다. 그의 기쁨은 구세주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분에게 영혼들을 인도하는 데에서만 존재했다.
특히 스펄전은 자신을 위한 영욕을 버렸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19세기 영국에서 복음이 한낱 도덕이나 윤리 종교의 한 영역으로 추락하는 것에 맞서게 하셨다. 또 그의 순수함과 열정적인 믿음을 받으시고 그의 삶을 풍성하게 하셨으며 그를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목회자로 세우신 것이다. 영혼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자신의 주인인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렸던 스펄전은 실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Ⅱ) 말씀이 있는 쉼터 > ㆍ글모음·예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만명을 전도한 ‘드와이트 무디’ (0) | 2005.06.23 |
---|---|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의 주역 - 조나단 에드워즈 (0) | 2005.06.23 |
하나님 손에 이끌린 종교개혁 - 마틴 루터 (0) | 2005.06.23 |
아이젠하워 장군, `기도로 시작된 노르망디 상륙작전` (0) | 2005.06.23 |
" 맥아더 장군의 기도 " (0) | 2005.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