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7. 3. 22:10

쓰임 받는 인생...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언어에는 용법(쓰임새)에 관한 이론이 있다. 언어의 의미는 그 철자나 단어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용어가 쓰이는 곳에 있다는 내용이다.
      맞는 말이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말이 있다면, 이 '사과'라는 단어 안에 있는 '시옷(ㅅ)'이나 '기역(ㄱ)'은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다. 각각의 철자는 '사과'라는 단어 안에서 쓰일 때 의미를 얻게 된다. 이는 단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과'는 무슨 뜻일까? 그 의미는 사과가 어떤 문장에서 쓰여지는가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내가 지금 배가 고파서 '사과를 먹고 싶다'는 문장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과일을 지칭할 것이며, 얼마 전에 누구와 다투어서 '사과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단어는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를 지시할 것이다. 이렇듯이 단어의 의미는 문장 속에서 쓰임 받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예전에 언어의 의미는 '용법'이라는 이 통찰을 우리 가족 안에서 활용한 적이 있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셋째 아이가 나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아빠, '만약'이 뭐예요?"
      아마 어린이집에서 '만약'이라는 단어를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 때가 제일 난감하다. 차라리 어려운 단어에 대해서 물으면, 쉬운 말로 풀어주면 된다. 하지만 쉬운 단어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문득 '언어는 용법'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생각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혜야, 만약 아빠가 대답하지 않으면 어떡할래?"
      아이는 대답했다.
      "아빠를 미워할 거예요." "만약에 비가 오면 어떡할래?" "우산을 쓰고 나갈 거예요." "만약에 할머니집에 가면 어떡할래?" "기분이 좋을 거예요." 이렇게 만약이 들어가는 문장을 대여섯 개 정도 말해주었더니 아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저쪽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때로 우리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할 때가 있다. 삶의 의미는 고독한 고민속에서 획득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을 때 그곳에 내 삶의 의미가 있다. 내가 무엇을 배웠느냐도 중요하고,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에게 쓰임 받고 있느냐이다. 아무에게도 쓰임 받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쓰레기 인생이 된다. 쓰레기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저질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부잣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고급일 수도 있다. 그러나 쓰레기의 문제는 저급함의 문제가 아니라 쓰임 받지 못함의 문제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쓰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찾으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쓰신다는 그 사실 속에 내 삶의 소명이 있고 기쁨과 행복이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향했던 주님의 음성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는 음성이다.

    " 일어나서 네 발로 서라.
    이는 내가 이 목적을 위하여 너에게 나타났음이니
    네가 본 것과 내가 너에게 나타나게 될 일에 대하여
    너를 일꾼과 증인으로 삼고자 함이라. (사도행전 26:16)"




    ─[ & 행복 그림 찾기 ]

    ( 쓰임 받는 인생...?)

       ■ 글 / 장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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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6┃낮은 울타리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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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쓰레기다... "
       " 내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되시는 분... "
       " 하나님 말씀과 함께 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
                               ∼
    HanSaR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