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6. 23. 23:47

백만명을 전도한 ‘드와이트 무디’

 

[역사를 움직인 기도-세계편 12]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1837~1899)

“나는 이 세상의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일은 평범한 재능을 지닌 남녀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많은 재능을 한꺼번에 받은 사람은 아주 적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있고, 세가지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있다. 이에 비해 나에게는 반 달란트밖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일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며 그의 은사는 2배, 3배로 증가될 것이다.”(드와이트 L. 무디)
 
드와이트 무디

드와이트 무디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더불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1837년 2월 5일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 노스필드(North Field)에서  석공(石工)이자 청교도였던 아버지 에드윈 무디(Edwin Moody)와 어머니 배시 홀튼(Betsy Holton)사이에서 여섯 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무디의 아버지는 그가 4세 때 심장병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갔다. 이로인해 그의 가정은 심한 재정적 곤란에 처하게 됐다. 어머니 배시의 근면과 남은 가족의 단합 그리고 노스필드 지역 교회의 도움으로 가족들은 흩어짐은 면할 수 있었으나 이로인해 무디는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무디는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근육질의 탄탄한 체구에 열심히 노력하며 야심 있고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7살(1854년)이 되자 고향을 떠나 보스톤으로 가서 삼촌의 구둣가게에 취직했다. 독실한 신자였던 외삼촌(Samuel Holton)의 요구조건은 매 주마다 주일학교와 교회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못해 주일학교에 등록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그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주일학교 선생님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을 만난다.

킴볼 선생은 성경 한권을 무디에게 선물했다. 킴볼 선생이 요한복음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거의 문맹에 가까웠던 무디는 창세기를 폈다. 당황한 무디는 다음 주일 결석했으나 킴볼 선생의 설득으로 매일 성경 두장을 읽을 것을 약속하고 다시 교회를 출석했다. 그리고 킴볼 선생의 도움으로 일년이 지나자 무디는 성경을 잘 읽을 수 있게 됐다. 킴볼 선생은 이제 무디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의 존재를 이야기할 때가 왔다고 느끼고 구둣방으로 찾아갔다. 그는 조용히 무디의 어깨를 짚고 “나는 그리스도께서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야기 하고 싶단다.”고 말했다.

몇 분 후 무디는 자신의 몸이 녹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가 무르익었던 것이다. 킴볼 선생이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네”하고 대답했다. 중생체험 후 무디는 즉시 무릎을 꿇고 고백기도를 드렸다. 실로 그 시간은 그가 회심과 함께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이때가 1855년 4월 21일이다.

한편 킴볼 선생은 무디의 회심체험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의 간청은 설득력이 적었지만 나는 진실했다. 그 청년은 자신에게 임한 그 빛을 받도록 예비 되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는 몰랐으나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로 이미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회심체험과 관련해 훗날 무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새로운 세계에 있었다. 새는 더 즐겁게 노래하고 태양은 더 밝게 빛났다. 나는 이전에 이와 같은 평안을 결코 알지 못했다.”

1856년 9월 무디는 시카고로 거처를 옮겨 구두점에 취직했다. 그의 검소하고 신실한 생활방식, 밝은 예의심, 그리고 예리한 직업의식과 무한한 열정은 그를 일약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그가 맨 처음 했던 일들은 교회예배와 주일학교, 그리고 집회에 사람들을 모아오는 일이었다. 그는 시카고 빈민가에 사는 거친 소년*소녀들을 상대로 기독교 사역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처음에 그는 말씀을 가르치기에는 자신의 학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무디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성경을 증거하는 값진 은사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호텔, 하숙집 때로는 술집이나 도시 북쪽에 위치했던 빈궁한 수백여 가구들을 홀로 돌아다니며 전도했다.

그가 이러한 작은 일들을 열심히 찾아서 했던 이유는 자신이 스스로 그들을 가르칠 수는 없어도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년동안 나는 내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믿을 수 없었다. 또 어느 누구도 나에게 어떤 일을 해보라고 제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다.” 무디는 자신이 가졌던 한 가지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무디의 불신영혼에 대한 전도 열망은 너무나 강했다. 1860년 그는 사례를 받지 않고 어린이를 위한 선교와 새로운 YMCA를 운영하기 위해 자신의 사업마저 포기했다. 그 이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영적인 축복을 맛본 무디에게 있어서 사업가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야망이나 돈버는 일은 이미 관심 밖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무디는 기독교 사역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헌신했다. 매 주일 그는 자신이 전도한 사람으로 네 개의 교회 의자를 채워 나갔다. 그는 23세 때 자신만의 주일학교를 세웠다. 이곳에서 그는 교사가 아닌 행정가와 새 회원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군목으로 봉사하기도 했으며 1866년에는 YMCA의 회장으로 일했다.

1872년 시카고 대화재로 인해 그가 건설한 것은 모두 파괴되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그의 전도 집회는 그 전역을 흔들곤 했다. 그는 영국 전도여행(1873~1875)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73년 제3차 영국방문 때 요크(York)에서부터 부흥사로서의 그의 삶은 열리게 된다. 여기서 그는 부흥회의 동역자 아이라 데이비드 생키(Ira David sankey)와 함께 한 길을 걷게된다. 생키는 찬송 작곡가 이며 반주자로 무디의 전도 운동에 기여한 바가 크다. 무디의 솔직한 설교와 생키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은 곳곳에서 많은 회심자들을 낳았으며 무디는 전도자로서의 탁월성을 인정받게 된다. 부흥집회는 그들이 발길을 닿는 곳 마다 대성황을 이루었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회중 집회에 찾아와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는 학식보다 경험이 녹녹히 녹아있는 재담꾼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의 영어는 종종 문법이 틀리기도 하고 설교 원고는 철자와 문법이 틀리곤 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핑계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한 번은 무디의 설교를 들은 한 청중이 그의 문법실력을 지적하면서 청중 앞에서 설교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무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도 제 자신이 실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받은 재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문법 실력을 갖추신 당신은 과연 실력으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이 말은 무디에게는 사실이었다. 그는 세련된 설교자는 아니었으나 늘 최선을 다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목사 안수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에 쓰셨던 것이다. 실제로 무디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D. L. 무디라고 서명하고 일생동안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다. 그는 단지 ‘평범한 무디’ 혹은 ‘부흥사(復興師)무디’로 불리길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어느날 무디는 자신의 야망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는 욕망보다 커지게 된 시기에 영적으로 침체기에 이르렀음을 알게 됐다. 그러나 그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성령 충만, 성령 세례, 기름 부으심, 봉사를 위한 권능에 초점을 맞춘 설교를 했다. 이 시기 브루클린에서 시작된 미국 부흥 운동이 각지로 전파되면서 신문들에 매일 집회 소식과 함께 설교 전문이 실렸다. 당시 신문에 실렸던 그의 설교들은 `견고한 성을 붙들다`(Holding the Fort), ‘복음을 깨달으라’(The Gospel Awakening), ‘위대한 구원’(The Great Redemption)등이 었으며 이들은 모두 책으로 출판됐다. 

그는 40년 동안 미국과 영국에서만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 무디는 거듭난 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복음을 증거했으며 매일 최소한 한명의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결코 잠자리에 들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복음전도자였다. 말년에 무디는 두개의 학교(무디성경학교/노스필드신학교)를 세웠고, 노스필드에서 정기적인 성경대회를 개최했다. 또 그는 1880년에 공동수양관을 개설했으며 1886년에 세계 학생연맹, 1893년 부인협의회, 1894년 ‘노스필드의 메아리’라는 정기 간행물을 발간, 1895년 종교서적 판매 연합회 등을 발족시켰다. 

무디는 한권의 책도 그가 직접 탈고해 본적이 없었다. 그는 편찬을 도운 송가집과 설교 출판물의 수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는 한 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돈을 그가 세운 노스필드의 여러 학교와 시카고에 있는 `성경학교`(the Bible School)에 기부했다.(그가 세운 성경학교의 등록인원은 1893년 당시 1,933,210명이었다.) 그는 자녀들에게 아무런 재산을 남기지 않았으며 단지 미망인에게는 겸허한 생활을 본으로 남겼을 뿐이다.

“언젠가는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한 마디도 믿지 마십시오. 그 순간 나는 지금보다 더욱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1837년에 ‘육신’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1855년에는 ‘영’으로 거듭났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죽겠지만 영으로 태어난 것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는 그가 사망하던 해(1899년)에 뉴욕시 집회에서 했던 말이다. 1899년 11월 22일 무디는 미주리(Missouri)주 캔사스 전도 집회 도중 심장 질환으로 62세를 일기로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 누구도 무디가 하나님을 위해 이토록 놀라운 일을 해내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없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오히려 무디는 부적합한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디가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점차 더 큰 일로 그를 부르셨고 모든 능력을 공급하심으로써 그를 부흥의 도구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