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7. 10. 23:55

" 밀리언 달러 베이비 " (가져온 글)


세상 영화의 제목이다.
마카로니 서부극(이탈리아식 서부극)으로 세상에서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70세를 넘긴 나이로 메가폰을 잡고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미국 영화 아카데미는 그에게 그리고 그 영화의 여주인공에게 아카데미상을 주었다.
내용은 이러하다.
자신의 친딸과 소원해진 은퇴한 복싱 트레이너는 늘 자신의 소원해진 친딸에게 편지 쓰는 것이 유일한 낙이며 자신의 은퇴한 늙은 퇴물(?) 복서 영감과 담소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자신의 친딸은 자신을 외면하였고 그 친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늘 반송된다.
그에게 있어서 있는 혈육은 그를 외면한 친딸 밖에는 없다.
그는 이제 늙었고 자그만한 촌구석 체육관에서 여생을 보내는 일 그것 뿐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복싱을 하겠다는 30대 초반의 여자가 나타났다.
영화의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이기고자 하는 열정으로 활활타고 있다.
그녀도 집안은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세상말로 재수없는 콩가루집안이다. 이후에 복싱을 하다가 사고로 병원 신세를 질때 그녀가 번돈만 탐내는 그러한 참으로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가족아닌 가족인 것이었다.
70이 넘은 늙은 트레이너는 그녀를 마치 자신의 친딸처럼 복싱을 트레이닝한다. 그녀의 상처를 꿰메어 주고 그녀의 승승장구를 지켜본다.
그러면서 그는 늘 그녀에게 "스스로 늘 자신을 보호하도로" 권면하며 반복한다.
이것이 소위 잔소리겠지만......
그러나 그녀 생애의 마지막 전에서 그녀는 다 이긴 게임을 일순간의 방심으로 머리와 목을 손상당하고 그만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목에 호스를 해야 호흡을 할 수 있는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복싱을 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복싱으로 이루려고 하였고 복싱으로 날려버리려고 하였다.
트레이너는 그녀가 그녀의 식으로 멋대로 하다가는 그녀가 언제가는 완전히 쓰러지리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너무도 자세히......... 그래서 늘 걱정이 그 걱정의 표정이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순간의 방심으로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 병원에서 썩어가는 자신의 다리를 절단해야 되는 식물인간 직전의 몸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녀는 혀를 깨물고 자살을 시도했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차라리 깨끗히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전의 사라진 아버지 처럼 예전에 키우던 절름발이 개를 안락사 시킨 그 예전의 아버지 얘기를 한다. 그리고 그 개처럼 그렇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트레이너는 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냐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늘 대전이 있을 때마다 입혀주었던 까운의 등뒤 글귀를 진짜 의미를 그제서야 말해준다.
"나의 사랑, 나의 핏줄"이라는 뜻이었다.
70 먹은 노인 트레이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녀를 친딸로 생각하고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녀를 지금은 완전히 잃기 직전이다.
아니 차라리 지금은 완전히 잃었다.
그는 그녀를 보다 못해 자고 있는 그녀에게 그녀의 소원대로 아니 오히려 그의 바램대로 그녀가 자고 있는 사이 목의 호스를 뽑고 아드레날린(?)를 주사기로
그녀를 안락사 시킨다. 한마디로 이 장면에서 언뜻보면 아연실색할 상황이다.
그는 더 이상의 살 수 있는, 그리고 살고 싶은 소망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늙은 복서 오래된 친구에게도 그리고 체육관으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제 살만큼 살고 더 이상 애착을 두고 사랑할 수 없는 늙은 트레이너는 자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의 친딸과 같은 복서와 같이 죽음으로써 생을 비참하게 마감한 것이다.
찝찝한 영화다.
세상에서는 휴먼 드라마라고 하지만 그리고 아카데미상을 받았고 감동을 주는 영화라고 하지만 찝찝하다.
역시 늘 습관적으로 예수님 생각을 해본다.


......................................

 

그러나 나를 이러한 찝찝한 속에서도
이 더러운 세상에서 나를 살 수 있도록 고비를 조이는 것은
나를 살 수 있도록 ............

누군가 사랑할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와 열정이 있다는 것과
육신은 노화되어 갈지라도 누군가 좀더 아끼고 자신과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또한 영화 주인공에게 꼭 죽일 필요가 있었겠냐는 꾸짖음보다는
이 세상이라는 자체가 "공정함" 따위는 고작 세상말로는 "얼굴마담"
이나 "장식용"으로 정도로만 생각하는 그러한 모순 속에서
사랑할 것이 없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그러한 극단적인 생각이
차라리 썩은 구린내나는 산 송장 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왠지 가슴을 찜찜하게 한다. 가슴이 아프다.

성경에서는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낫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 이시라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하나님의 꾸준한 잔소리를 듣고 산다.
문제는 우리의 지나칠 정도의 우리식 사고방식 곧 육신적인 사고방식과 말씀에 대한 고지식한 거부에 있다.

어제 잘했어도 오늘의 방심으로 끝나버리는 비참함의 위험들 속에서
그저 우리를 사랑해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잔소리도 아랑 곳하지 않은채
멋대로 살았던 그리고 멋대로 살고 있는 우리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 여주인공에게
"왜 경험많은 늙은 트레이너의 말을 깊이 있게 듣지 그랬어? 응!"
이라고 애태울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라"는 그 쉽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은 말을
멀리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안타까운 상황에 동질감 마저 느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아무 희망도 없고 아무데도 바라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없을 때
속으로라도 외쳐보자!

"정말로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살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정말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을, 이웃을, 원수를........
사랑하게 해달라고.........성경대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성경의 믿음대로 서로 사랑하라!
세상의 사람은 또 하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만들 뿐이며
또 하나의 "힐러리 스웽크"를 만들 뿐이다.
세상의 사랑은 남는게 없다!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마도 아니 직관하건되
이 전 우주에서 가장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가장 많이 느낀 존재가 있었다면
그 랭킹 1위는 .....묵상하건되.....하나님이었을 것이라는 직감이 ............
늘 묵상한 이후의 결과처럼 뜻도 모르는 일방적인 암기가 아닌, 하나님을 좀더 이해하게 하는 시간과 장소에 나는 지금 앉아 있다.
말 안듣는 자신의 피조물 때문에 ......게다가 말 안듣는, 자신의 또 다른 분신들(아들들) 때문에..............


『 이 승호 / 내 뒤의 세상을 보며(http://www.eruntech.net/)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