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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가 사용하는 "인기 있는" 수단 ː신교육ː
미국에서 서구문화를 재편성하려는 뉴에이지 집단의 중심 활동 무대는 이 교육 분야다. 마릴린 퍼거슨은 "꿈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는 젊은 세대를 위한 교육에 변혁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새로운 사회는 저절로 형성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마릴린 퍼거슨의 <물병자리 시대를 위한 결탁, Aquarian Conspiracy>, 280면). 비단 뉴에이지 사상뿐만 아니라 어떤 새로운 이념을 사회 전체에 확산시키고 그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에는 사실 교육분야만큼 효율적인 분야가 없다. 뉴에이지 교육철학의 규범은 이른바 "개인한계초월 교육"(transpersonal education)이다. 이것은 각 개인의 무한한 신적 잠재력을 인식하고 또 그 계발(啓發)을 "뉴에이지"라는 새로운 시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로 굳게 믿고 있는 뉴에이지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교육이념이다. 사실상 "개인한계초월"이라는 말은 "인간의 초탈(超脫) 능력"을 강조하는 심리학 용어로서 이 역시 마릴린 퍼거슨이 "뉴에이지 이념 교과서" <물병자리시대를 위한 결탁>에서 맨처음 뉴에이지 세계에 도입했는데, 그녀는 이것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개인한계초월 교육에서는 학생들에게 각기 자신의 잠재능력에 대해서 각성케 하고 자율적인 사람이 되며, 항상 의문을 갖고 인간 의식이 경험하는 모든 영역의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그 의미를 추구하며, 외부적인 한계를 시험해 보고, 자아의 모든 영역과 깊이를 조사해 볼 것을 촉구한다(퍼거슨의 287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와 같은 사실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뉴에이저들의 진술을 대할 때, 우리는 한 단어, 한 단어 뒤에 교묘히 숨겨 놓고 있는 저의를 놓쳐서는 안 된다. 가령, "잠재능력"이라 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간 스스로가 허구 속에서 상상해 내는 "신적 요소"를 말한다. 이것을 "각성"케 하고, 이것에 따라 행동하는 "자율적인 사람"으로 키우며,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진리에 대하여 항상 "의문"을 갖고 "하나님의 진리"라는 틀 안에 갇힌 "한계를 시험해" 보고 거기서 탈출하도록 가르치는 것, 이것이 뉴에이지의 교육철학이다. 뉴에이지의 이러한 저의는 그 이념을 실제로 도입해 사용하고 있는 교육현장에서 실질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신교육 이념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는 인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하버드 대학 교육학 교수 피어스 박사(Dr. C. M. Pierce)는 1973년 아동교육에 대한 한 세미나에서 일천 명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이가 다섯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가는 미국의 모든 아동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그 나이에 벌써 사회를 건설한 우리의 조상들에 대하여, 우리가 뽑은 관리들에 대하여, 부모들에 대하여, 초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과는 동떨어진 조국의 존엄성에 대하여, 어떤 확고한 "충성심"을 마음 속에 지닌 채 학교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미래의 국제화된 어린이들을 창조해 냄으로써 이들 병든 아동들을 건강한 어린이로 만드는 일은 여러분 교사들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다[캐릴 매트리시아나(Caryl Matrisciana)의<뉴에이지의 신들, Gods of the New Age>, 170-171면]
이 말은, 어린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이미 배운 전통적 가치관은 모두 쓰레기와 같다는 뜻이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어린이들이 이미 병들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생각은 비벌리 게일리언 박사(Dr. Beverly Gaylean)가 주창하여 미국에서 이미 일반화된 소위 "융합교육 시스템"(confluent education system)에 의하여 더욱 널리 확산되었다. 공립학교에서 이미 정규과목으로 자리잡은 이 융합교육 시스템의 일부로 이른바 "유도상상 훈련"(guided imagery training) 프로그램을 실제로 견학했던 프랜시스 아데니(Frances Adeney)는 1981-82년 동계호지 28면에 게재된 <동방을 바라보는 교육자들, Educators Look East>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관찰기를 발표했다.
스물다섯 명의 일학년 어린이들이 꼼짝하지 않고 조용히 교실 바닥에 앉아 있다. 교사가 어린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어떤 글귀를 잔잔하게 읊조린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 명상여행이 시작된다. 어린이들은 마음 속에 태양을 그려본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높은 하늘 위에서 그들에게 강렬한 빛을 내리쬐고 있는 태양을 상상한다. 그러자 그들의 심안(心眼)은 그 태양을 자신들에게로 끌어내리라고 말한다. 빛은 그들의 뇌리 속으로 들어와 물결치다가 가슴으로 흘러내리고 조금 더, 조금 더 온 몸으로 퍼져 나가 이윽고 몸 전체가 이글이글 태양 빛에 불탄다. 자, 이제 너 자신이 무엇인가 완전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마음 속에 그려 보라고 교사가 일러준다. 너 자신이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계속 음미하라. 이것은 너의 빛이요, 너의 지성이요, 바로 너의 태양이다. 이제 너의 온 몸이 빛이 되었다. 교사는 빛으로 가득 찬 자기 자신을 바라보라고 어린이들에게 지시한다. 그리고 이제 우주 속의 모든 빛을 가득히 안으라. 그 빛과 함께 그들은 이제 평강을 느끼고, 그들은 이제 완전해졌다고 교사가 말한다. 어린이들이 이 환상 여행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그들은 이제 지성적이고 위대하고 그들 자신 속에 우주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교사가 상기시켜 준다.
이 융합교육 프로그램은 뉴에이지가 개발한 수많은 교과과정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학생들이 어릴 적부터 자신의 "고차원적 존재"인 신성에 낯익게 하려는 의도에서 고안된 것이다. 이 교육이념의 목적에 대해서 비벌리 게일리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본질적으로 우리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물질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우주의식," 즉 신 또는 영의 한 부분이다. 이 우주의식은 그 밑바탕이 곧 사랑이다. 이 본질적인 통일성을 깨닫고 스스로 자신이 그 일부임을 체험하는 것은 어린이 교육의 주요 목표다. (2) 각 사람은 그 본질이 사랑인 우주의식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어린이들 각자도 우주의 모든 지혜와 사랑을 몸 안에 품고 있다. 이 지혜와 사랑이 곧 "고차원적 자아"다. "내 마음은 이미 이 단어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그 철자법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라고 어린이들에게 지시한다. 자아가치와 자기 확신감을 배우는 가운데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완전하고 사랑 덩어리이며 지혜 덩어리라는 이야기를 직접 듣는다. 어린이는 이 우주 정신 안으로 발을 들여 놓고 우주로부터 충고와 정보와 도움을 받게 된다. 이러한 일은 보통 명상을 통하여 "영적 안내자들"과 접촉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3) 각자가 무엇을 느끼고 그것을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실체를 스스로 창조한다.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긍정적인 사고와 사랑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라고 가르쳐 줄 때, 그들의 실체는 바로 긍정적인 사고와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 물질세계는 환영이며, 우리가 마음으로 그것들을 인지할 때에만 그 존재는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건 그 진실은 외형적인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주관적으로 체험할 때, 그 속에 진실이 있게 된다. 따라서 학생들의 모든 행동은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고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장엄함과 접촉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1980년 8/9월호 <뉴스레터, Newsletter>지 16면에 실린 비벌리 게일리언의 [어린이들과 명상하며 : 우리가 배운 몇 가지들, Meditating with Children : Some Things We Learned] 중에서).
이러한 교육이념은 힌두교의 전일론적 사고관을 도입한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금새 알 수 있지만,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단지 위의 진술만을 놓고 그 터무니없는 허구성을 공격하더라도 가히 한 권의 책을 낼 수 있을 정도다. 설령, 어떤 "우주의식"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어째서 "신"인가 하는 문제, 그 "의식"이 과연 물질계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더구나 그 "우주의식"의 밑바탕이 곧 "사랑"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 그것에 접근하는 데에 하필이면 왜 "영적 안내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 등등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논리적 해명이나 설명도 없이 "그저 그렇다."는 전제부터 미리 깔아 놓고 논리를 전개한다. 이것이 모든 뉴에이저들의 공통된 전형적 논리전개 방식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교육"이라면 모든 요소들에 대한 타당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마음은 이미 이 단어를 어떻게 써야 할지 그 철자법을 알고 있다."고 가르치라니, 뻔히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어린이에게 어떻게 거침없이 자기 기만 습성부터 가르치란 말인가? 그것이 교육이란 말인가? 사물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체험할 때 그 속에 진실이 있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어린이들에게 객관적 윤리·도덕관을 아예 무시하는 습성부터 길러 주란 말 아닌가? 교육에 대한 이러한 신비주의적 접근은 그 황당한 심령술적 색채를 감추기 위하여 학생들에게 "전뇌적 인지"(全腦的 認知 : whole-brain knowing)라는 개념을 또 주입한다. 전뇌적 인지란 우뇌(右腦)와 좌뇌(左腦)의 양쪽 기능을 결합시켜 완전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말하는데, 좌뇌는 분석력을 갖고 있어 논리적, 이성적 사고에 관계하는 두뇌이고, 우뇌는 직관(直觀)기능을 갖는 두뇌라는 것은 이미 신경의학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개인한계초월 교육은 이 양쪽 두뇌부의 기능강화를 추구한다. 마릴린 퍼거슨은 "어떤 상징력이 양쪽 두뇌부 사이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함으로써 말없는 우뇌가 직관을 통하여 얻은 상징적 지식을 좌뇌로 전달해 주면, 좌뇌가 그것을 분석해 보고 그 내용을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퍼거슨의, 305면). 이러한 양쪽 뇌의 합동작업으로 우뇌는 내용을 깨달으려는 상황을 설정하고 좌뇌는 그 실제 내용을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뇌적인 인지를 강조하는 개인한계초월 교육 방법에 대해서 케리 맥라버츠는 이렇게 비판한다.
전뇌적 인지에 대하여 뉴에이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학생들은 마음 속에 신비상태가 유입되어 전일론적(일원론적)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된다. 따라서 뉴에이지의 주관적 과학과 마찬가지로 개인한계초월 교육, 또는 전일론적 공부방식을 도입하면서 괴상한 방법들이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다(맥라버츠의 <뉴에이지냐, 케케묵은 거짓말이냐?>, 50면).
뉴에이지의 융합교육 시스템은 그들의 인간잠재력 개발운동의 일환으로 개발된 교육 시스템으로서 이 운동은 서구세계가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과 결합한 결과로 태어난 "신계몽운동"(neo-enlightenment)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와 인간 잠재력에 관한 연구는 미국에서 폭발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라이프스프링, Lifespring>, <실바 마인드 컨트롤, Silva Mind Control>, <사이언털로지, Scientology> 등을 위시한 심령학 유형의 사이비 이단종교 단체들이 앞장서서 "인간은 기억 상실증에 걸려 있다."는 공통된 견해를 밝히고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이 우주적 관점에서 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현대인의 의식진화에 불을 붙여 인류를 잠에서 깨워 새로운 문화적 각성에 눈뜨게 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 운동은 물론 전면적으로 뉴에이지 운동에 파급되어 뉴에이저들이 "신으로의 진화과정"을 밟는 유일한 경로로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심령학 유형의 뉴에이지 단체들은 수많은 대기업들과 손을 잡고 종업원들의 잠재력 개발이란 명분으로 갖가지 세미나를 열고 심령학 훈련을 실시한다. 물론 이것은 뉴에이지 사상을 널리 확산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지만 다분히 흥행적인 요소가 짙다. 뉴에이지 흥행업자들은 기업들을 상대로 종업원들을 단체 연수하는 수련회를 열고 "동기유발"이라든가, 스트레스 관리, 잠재 에너지 개발, 공동체 의식 등이나 또는 극기훈련 같은 과정을 통하여 영적 각성 훈련을 실시하여 돈을 번다. 우리 나라에서도 대기업들은 물론 웬만한 중소기업들도 신입사원들을 채용한 뒤 이러한 훈련과정을 실시하는 것은 하나의 관례로 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훈련 프로그램들이 무조건 뉴에이지 운동의 일환이라고 싸잡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다"든지, "현실은 투시되고 인식됨으로써 창조된다"든지, "행동기준은 인간이 선택한 것만이 가치가 있다"든지, "진리란 우리가 마음 속으로 무엇이 본질인가를 인식하는 데 따라 달라진다"든지, "설사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일지라도 그것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면 그대로 하는 것이 스트레스 관리에 도움이 된다"든지 하는 따위의 영적 기만은 신비주의적 뉴에이지 인본주의 세미나 활동의 특징이다. 그리고 거의 예외없이 실시되는 "자아인식" 프로그램에서는 "투시"라는 테크닉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현실이란 마음 속에 그려 봄으로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장래의 어떤 현실을 심령적으로 꿰뚫어 봄으로써 그 현실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뉴에이지 특유의 기술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 또 명상, 자기최면, 노래 흥얼거리기 따위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갖가지 단체 세미나 및 개인상담, 그리고 교육기관에서의 공식적인 교과과정을 통한 뉴에이지 교육철학의 보급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저들의 저의는 여전히 인본주의 사상을 어떻게든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 주고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려는 "피나는 노력"의 소산이다. 오늘날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나라를 포함하여 전세계 교육계에서 "개인의 잠재능력 개발"이나 "개인한계초월," 뉴에이지적 "가치규명" 이념 등에 대해서 반대의 깃발을 드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 반기는커녕 거의 모든 교육자들이 이 뉴에이지적 교육이념에 열렬히 호응하고 지지를 보내는 실정이다. 어린 학생에게 "그것도 모르느냐?" 또는 "너는 알 수가 없다."고 가르치기보다는 "너는 얼마든지 알 수가 있다." "너는 이미 알고 있다."고 가르치는 편이 얼마나 더 매력적이며 또 학생들의 귀에 즐거운 메시지인가! 게다가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라고 말하기보다는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게 옳은 것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더 마음 편하고, 또 거꾸로 자신의 생각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어수단인가! 이것이 현대교육이 갖는 매력이다. 이것이 뉴에이지 이념이 현대인들에게 인기를 얻는 또 한 가지 수단이다. 그래서 사탄이 테이블에 펼쳐 놓고 사람들을 "즐겁게" 제압하는 "로열·스트레이트·플러쉬" 가운데에는 전일론적, 심령학적 신비주의 교육철학이라는 카드가 또 한 장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 No.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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