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7. 17. 12:46

『New-Age의 - "전일론적 의술"』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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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에이지가 사용하는 “인기 있는“ 수단
    ː전일론적 의술ː

      에이지 운동을 비판하는 연구가들 가운데 특히 미국을 위시한 서구 세계의 비평가들이 가장 많은 오해와 혼란을 야기하는 분야가 바로 이 뉴에이지의 “전일론적(全一論的) 의술”(holistic medicine)에 관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서구 학자들(특히 그리스도인 연구가들)은 뉴에이지의 전일론적 의술(醫術)에 대하여 신비주의적 비술의 일환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러한 매도(罵倒)는 오히려 이 분야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어 뉴에이지 연구가들에게 거꾸로 반격을 받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동양철학의 전일론 자체는 성경적으로 조명해 볼 때, 아닌게아니라 상당히 반기독교적 이교도 사상과 신비주의 요소들이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상을 의술에 적용한 소위 동양의술의 경우 매우 과학적인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래 전일론은 동양 종교 내지 우주관의 근간이 되는 관념이었고 이것이 의학적인 관념으로 적용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인체(人體)를 전일론적으로 설명하는 동양의학은 아주 우연히도 성경적인 “인체관”(人體觀)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성경은 사람의 몸이 “놀랍고도 경이롭게” 지어졌고 그 기묘함을 “내 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말씀한다(시 139:14).
      성경은 또,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어 만드신 인간의 “몸”(창 3:19)에 “영”을 주셔서(욥 32:8) 정신적 본성이 되게 하셨고(고전 11장), “혼”을 주셔서(창 2:7┃시 139:14┃골 3:10) 모든 정서와 의지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행 2:37┃출 35:21┃시 39:3┃욥 10:1┃요 14:1┃시 57:7┃잠 28:14┃롬 10:9, 10). 그래서 인간은 “영, 혼, 몸”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리고 사람은 그 영이 혼을, 혼이 몸을 다스릴 것을 여러 곳에서 가르치고(롬 6:18, 19/8:12, 13┃눅 21:34┃벧전 2:11┃고후 12:7), 또 “몸”보다는 “혼”의 단련이 더 유익함을 가르친다(딤전 4:7, 8). 동양의학의 전일론적 “치본의학”(治本醫學) 개념은 “마음”으로 “몸”을 다스린다는 성경적 인체관과 맥을 같이한다. 따라서 동양의학의 전일론적 접근방식을 미신적인 신비주의 사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앓는 질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는 사도 바울의 의학적 충고는 잠시 뒤에 살펴보겠지만, 동양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전일론적인 의학요법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전일론적(
    holistic) 의학개념이란 무엇인지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동양의학에서의 전일론적 사고관은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이 되는데, 그 하나는 “몸”이라는 규정, 즉 육체와 마음이 이분되지 않는 한덩어리로서의 인체라는 생각과 또 하나는 문화적인 풍토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전일성을 고려한다.
      건강과 질병도 인체라는 하나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건강과 질병, 질병과 건강은 서로 맞물려 변화하는 한 과정으로 본다. 그리고 몸이란 그 어느 부위도 별개의 독립된 기관이 아니며, 하다못해 손톱 끝이나 머리카락 하나라도 몸이 아닌 것이 없다. 더구나 동양의학은 마음까지도 한 몸으로 보고 콧물이나 눈물까지도 몸의 현상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의 슬픔은 온몸의 기능이 눈물로 설명되어지고,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온몸을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본다. 이것이 곧 이분되지 않는 “심신”(心身) 개념이고, 부분이 따로 없는 전체로서의 어느 한 부위를 보는 시각이며, 이것이 인체에 대한 전일론적 사고관의 출발점이다.
      동양의학이건, 서양의학이건, “병”이라는 정상에서 이탈한 이상현상을 “증후”(症候:
    symptom)라 하고, 부위적인 반응들을 일컬어 “증상”(症狀:diagnostic)이라고 말하며, 증상들을 종합한 증후로써 병을 판단한다. 이 말은 병을 국부적인 이상반응으로 보지 않고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을 찾아 치료하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질병치료를 위한 의술이 국소적이기 보다는 인체를 종합적인 하나의 단위로 보게 되는데, 동양의학의 경우 이것을 거의 모든 질병에 대하여 절대적인 원칙으로 지킨다.
      예를 들면, 동양의학에서는 눈(目)이란 간(肝)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기관으로 보고 거기에 부속되는 조직들은 또 다른 장부(臟腑)들과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보아 그러한 관점에서 눈의 질환들을 치료한다. 예컨대 백내장(白內障)이라는 증후는 안구(眼球) 자체의 질병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신장(腎臟) 기능의 이상현상이 밖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고 치료도 신장을 중심으로 하게 된다. 이것이 동양의학의 전일론적 사고관이다.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네 위장과 자주 앓는 질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딤전 5:23) 쓰도록 충고한 것은 전일론적 인체관이라는 관점에서 과학적 타당성을 갖는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포도주”가 오늘날의 포도주처럼 발효된 과실주 음료로 간주한다면, 그 안에 함유된 효모(酵母)가 직접 소화작용을 돕고, 산(酸)이 소화액을 분비하는 다른 기관에 작용하여 소화액의 분비를 촉진한다. 그리고 알코올 성분이 심장을 자극하여 혈액순환을 촉진함으로써 신진대사활동을 원활히 해준다. 이것만으로도 위장병에 대하여 쓸개, 지라, 및 심장과 같은 다른 기관들이 전일론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이 “포도주”가 발효되지 않은 “즙” 형태의 음료수에 불과했다손 치더라도 그 안에 함유된 타타르산과 포도당, 포도당 산화효소, 이노시톨, 펜토산 등등이 위장은 물론 위장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다른 기관들에 작용하여 종합적인 생리적 소화활동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역시 인체기관에 대한 전일론적 의술개념이 도입된다. 다시 말해서, 위장병에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신비주의 의술과는 전혀 다르다는 얘기다.

      이러한 신체관은 “몸”이라는 물질적인 신체에 나타나는 질병이 “마음”이라는 비물질적인 요인에서 발생했을 경우, 훨씬 복잡하고 광범위한 전일론적 사고관을 요하게 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서양의학에서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 대두되기 전에는 “마음의 병”(정신질환)이라는 범주 자체가 설정되지 않았고 일종의 “꾀병” 정도로 간주되었었다.
      그러나 동양의학에서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는 인체관을 견지한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드의 이른바 “심인성”(心因性) 질환에 대한 개념은 동양이 수천 년이나 앞서 있었다. 가령, 식사 중에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곧 체하게 된다. 마음의 반응이 위장이라는 신체적(물질적) 기관과 직결되어 작용한다는 증거다. 그래서 마음과 신체기관은 별개로 이분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관점이 곧 심신일체라는 전일적 인체관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피와 땀”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심혈(心血)을 기울여 온갖 노력을 다한다는 뜻이다. 말 자체의 뉘앙스를 보면 “피”는 정신적인 면을, “땀”은 육체적인 뜻을 내포한다. 이것을 동양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심신을 종합한 것으로 피와 땀이 다르지 않은 같은 근원에서 나온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동양의학에서 “혈”(피)이 충만하면 정신이 맑고 경쾌해진다고 본다. 이 역시 몸과 정신을 한 묶음으로 보는 전일적 사고관인 것이다. 서양의학의 경우에는 특히 정신병리학에서 이와 유사한 전일적 사고관으로 인체 및 인체건강 문제에 접근한다. 이른바 “스트레스”(
    stress)를 많은 질병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그것이다. 심지어 암(癌)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으로 스트레스를 꼽는 의학자들도 상당수다.
      물론 스트레스란 정신적인 측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몹시 매운 고추를 먹었을 때, 엄청난 생리적 스트레스를 가져온다. 이런 유형의 스트레스를 육체적 스트레스(
    physical stress)라고 부른다. 피로(疲勞)도 육체적 스트레스에 해당한다. 근심 걱정이나 불안, 초조 같은 정신적 스트레스(mental stress)는 신체 내에서 곧 육체적 스트레스로 전환되어 생리적(신체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공포감에 사로잡힐 때, 식은 땀이 흐르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예에 속한다. 이와 같이 어떤 정신 상태가 신체라는 물질적인 상태로 직결되는 현상은 동양의학보다는 오히려 서구의학의 생리학으로 더 쉽게 설명된다. 이것은 서구의학 역시 심신일체라는 전일론적 사고관을 의학에 도입하고 있다는 증거다. 서구의학에서 어떤 질환을 일컬어 “신경성”이라고 진단하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가령, “신경성 위장병”이라면, 위장 자체는 생리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정신적인 요인이 위장의 정상적인 기능을 저해(沮害)함으로써 나타나는 질환을 의미한다. 이 역시 전일론적 인체관이다.
      
      따라서 뉴에이지에서 갖가지 동양의술의 전일론적 건강증진법을 권장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신비주의 사상이라고 간주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뉴에이지를 비판하는 인사들 가운데 비교적 객관적이고도 냉철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케리 맥로버츠마저도 뉴에이지의 전일론적 건강론에 대해 샤머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잘못 공박하고 있음을 본다.

    전일론적 건강론은 뉴에이지의 주관적 과학관에서 잉태되었다. 전일론적 의료술은 “고대의 종교의식들과 자연 신령(神靈)들에게 기원하는 자연숭배 사상이 혼합되고 거기에 범신론 철학이 가미된 색다른 양상을 띠고 새로운 미국적 현상으로 등장했다.”(샤론 피쉬[Sharon Fish]의〈전일론적 건강법과 간호법Holistic Health and the Nursing Profession〉에서 인용해 온 표현이다.)... 뉴에이지의 세계관에 입각한 전일론적 의료술의 정신요법들은 마음 속에 먼저 어떤 심리적 관념의 틀을 주입해 놓고 “각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이 치료의 근원이 된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Kerry McRoberts의, 41, 42면) 

      여기서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이러한 전일론적 의료술들을 뉴에이저들 자신이 오히려 신비주의 보자기로 싼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신비사상을 인간 중심적인 그들 고유의 인본주의 사상으로 교묘하게 유도(誘導)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전일론적 의료술은 그 모두가 샤마니즘 차원의 원시적 신비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몰아붙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뉴에이저들은 이것을 오히려 의도적으로 신비의 세계로 몰고 간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몸에 대해서 “신비롭다” 고 느끼고 거기서 자신의 무한한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뉴에이지의 인본주의 사상에 자연스럽게 동조하도록 하려는 전략인 것이다. 뉴에이지 이념의 대모(代母) 마릴린 퍼거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건강과 질병에 대한 신사고 방식은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주고 개인의 책임감에 대한 의식변화를 촉구하는 가운데 물병자리 시대를 위한 결탁에 의하여 널리 확산되고 있거니와, “전일론적 건강요법은 공공정책의 일환”이라고 선언한 1978년의 워싱턴 대회는 몇몇 정부기관들과 민간단체들의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보건, 교육, 복지후생성에서도 산하기관들의 대표들을 보냈고 백악관 참모진도 참여했다... 정치인들, 의사들, 심리학자들, 전통의학 의료진들, 영적 교사들, 연구가들, 미래학자들, 사회학자들, 그리고 정책입안자들도 참가했다. (마릴린 퍼거슨의 〈물병자리시대를 위한 결탁〉, 259면) 

      위에서 “희망의 메시지”란 물론 “모든 인간이 신”이 되는 뉴에이지 시대의 도래에 대한 메시지라는 뜻인데, 전일론적 의료관이 이러한 희망을 제시해 주는 여러 가지 조짐들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뉴에이지의 이념에 미국 정부를 위시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호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뉴에이저들이 권장하는 전일론적 의료술들 가운데 맹랑한 것들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투시요법이라든가, 자기최면요법, 마술의식, 마인드 컨트롤, 신비체험강좌, 유도환각, 피라밋의식, 영교(靈交) 같은 것들은 순전히 신비주의적인 심령학적 사고관에서 나온 것들이며 사실상 동양의 전일론적 의료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심어주고 인간 자신 속에 꿈틀거리는 자아를 한껏 고개 쳐들게 함으로써 부지불식 간에 인본주의 사상에 물들게 하는 데에는 대단한 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건강문제에 대한 현대인들의 과민반응 현상을 교묘히 이용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쉽게 끌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심령학적 과정을 거치는 동안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는 체험하지 못하는 기묘한 쾌감이나 짜릿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뉴에이지의 갖가지 의료술 내지 건강 증진법들을 모두 신비주의적인 비술들이라는 한 보따리에 싸서 매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것들을 신비주의적인 한 보따리로 싸서 우리에게 내미는 뉴에이저들의 저의에 대해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튼, 이러한 전일론적 의료술은 뉴에이지가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그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데에 활용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그래서 사탄이 테이블에 펼쳐 놓은 “로열·스트레이트·플러쉬” 가운데 또 한 장은 바로 이 전일론적 건강요법이라는 그림이 그려진 카드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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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No.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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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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