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6. 23. 22:59

" 육신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 "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죄의 육신을 다루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방법은 '사망'이나, 육신은 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불사하고 양보한다. 그것은 종교적일 수도 있고 경건하게 행할 수도 있고 때로는 심지어 성결한 체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의로움의 근거는 "우리 죄를 위해 죽은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성화(
Sanctification)의 기초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이다(롬 6:8 / 갈 2:20 / 골 2:12,20, 3:1,3).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은 오래 서지 못한다. 기초가 없기 때문이다. 기초없는 벽은 곧 흠이나고 깨어져 무너지고 만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세워 지지 않은 건물은 궁극에는 다 무너진다. 우리는 기초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이는 죽은 자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이라" (롬 6:6-7).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내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를 밖으로 나타내는 삶이다(The Christian life is outliving the inliving Christ). 그것은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이 죽기전에는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도 그분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향유할 수 없다.
  그것이 저가 가르치신 바,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의 본뜻이다. 이 구절의 직접적인 적용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에서 이뤄졌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먼저 죽어야 했다. 그분이 죽는 것을 거절했다면 그분은 많은 형제들 중에서 첫번째 아들이 못되었을 것이다(롬 8:39). 그분이 십자가를 접했을 무렵 죽음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분은 아버지께, "아버지시여, 제가 저들 인간의 죄성과 무가치성을 볼 때 제가 저들을 위하여 죽어야만 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고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 직접 하늘로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들이 그분에게 침을 뱉고 그분을 조롱할 때 그분은 하늘의 열두 군단을 청하여 자기의 구출을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마 26:53). 심지어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라도 그분은 "이만하면 충분하지, 내게 주어진 한도 이상으로 나는 질만큼 지었으니까" 하고 미쳐 죽기 전에, 그 말만 남겨놓고 즉시 천상으로 곧장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분이 그렇게 해버렸다면 그분은 천상에서 자기 혼자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은 단순히 한 알의 밀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구출을 포기했던 것이다.
  똑같은 원칙이 현재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구하려면 우리는 잃을 것이요, 우리의 생명을 버리면 찾을 것이다(막 8:35).
  밀 한 알을 집어서 금속 상자 속에 솜으로 싸서, 보관해 보라 그것은 무한정 오래 보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한 알의 밀 밖에 못된다. 그렇지만 그 한 알의 밀을 땅 속에 심어 스스로 죽게 하면 그것은 수천의 다른 밀알을 생산해 내게 될 것이다.
  1881년 한「스코틀랜드」사람이 밀 알 하나를 심었다. 그 해 그 밀은 스물 두 개의 가지를 쳐서 오백육십개의 밀알을 내었다. 1882년 그는 오백육십알의 밀을 심었다. 그 해의 수확은 2되나 되었다. 1883년 그 수확한 것을 다시 심었다. 그 해 열일곱말(1말=10되=18ℓ)의 수확을 거뒀다. 1884, 1885년 같은 식으로 해서 그 씨앗은 2800말 곧 네 대의 유개 화물자동차의 양에 이르렀다.
  모든 씨앗은 번식하기 위해서 스스로 죽어야 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죽음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와의 신분상의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지만, 십자가의 못박힘은 실제 체험에서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믿을 때, (2) 하나님께 순종하고 스스로를 죽은 자로 여길 때, (3)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서 성령이 생활을 통해서 인도하실 때, 그래서 "옛 사람"은 가고 새 사람이 살 때(롬 6:6, 11, 13),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적으로 실감할 수 있다.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알아야 한다(롬 6:6).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은 바 됐다. 십자가의 두팔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양면을 의미한다. 일면은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고전 15:3 / 벧전 2:24, 3:18). 다른 한 면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어서 우리도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바 됐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은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이것을 아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다. 그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나타난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 뿐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혔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이것을 아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행위나 감정에 믿음의 근거를 둔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고 따라서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은 바 된 것이다.

  간주하라 (여겨라)

  성경의 귀한 명령의 하나는 로마서 6:11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는 산 자로 여기라"(롬 6:11). 이 구절을 순종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두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는 로마서 6:6절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죽었다고 믿지 않고서 죽었다고 간주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둘째는, 우리는 자신이 죽어야 마땅하다고 믿기 전에는 자신을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도 또한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는 한 스스로를 죽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보기 시작할 때 스스로 바울처럼 "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롬 7:24) 하고 부르짖을 때면, 그 때 우리는 스스로 죽은 자로 여겨도 좋은 것이다.
  "간주한다"(
Reckoning)는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먼저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간주하며, 그 결과로 하나님에 대해 살았다고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로 예를 들면 뿌리는 사망의 면이고, 열매는 생명의 면이다. 만일 우리가 죽은 것으로만 여기고 만다면 우리는 악취를 풍길 것이다. 우리는 "옛 사람"의 어떠함을 생각하며 괴로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옛 사람을 매장하고 무덤 속에서 꺼내지 말아야한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죽음 다음에 오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간주한다는 것은 삼중의 뜻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믿고 하나님을 순종할 것인지 부인해 버릴 것인지에 대한 양자 택일의 위기를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단순히 믿음의 결정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받아들인 것처럼 역시 믿음의 확고한 결심으로 스스로를 죄에 대해서는 죽은 바 되고 하나님께로 살아난 바 된 것을 믿어 간주해야 한다.
  둘째로 간주한다는 것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하고 말할 때 그는 매일매일 육체적인 사망의 위기에 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의미를 영적으로 적용시켜 보자. 아침 일찌기 고요한 시간을 틈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다. "오 주님이시여, 나는 당신께서 죽으신 것을 찬양하나이다. 당신이 죽을 때 저도 당신과 함께 죽은 것을 감사하오며, 하나님께 대해 산 것을 찬미드립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진실로 죄에 대해서는 죽은 바 됐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난 바 된 것을 시인합니다. 저는 당신이 오늘도 제 생활의 주인으로 임하옵시기를 앙망하나이다."
  만일 이같은 기도를 매일의 습관으로 한다면 새삼스럽게 간주하는 것을 생략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부주의할 우려가 많다. 우리는 이미 얻은 승리로써 만족하기 쉽다. 사탄의 강한 일침(一針) 곧 '너는 잘 해간다'는 꾀임에 넘어 갈 수 있다. 한 번 자아(
self)가 일기 시작하면 우리는 영적인 위기에 봉착한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시험에 당면했을 때, 우리는 먼저 스스로가 죽은 것을 상기하고 간주하자. 누가 우리를 헐뜯고 욕설을 하면, 자아는 일어서서 곧 대꾸하려 든다. 그러나 기억할지어다. 자아는 죽고 없는 것이다. 자아가 없다고 간주하라. 자아가 없으면 누가 대꾸할 수 있을까? 누가 모욕된 일을 내게 행했다 하자, 자아는 방어하려 일어선다. 그러나 기억하라 자아는 죽었다는 것을. 누가 일어서서 대꾸하랴! 우리가 간주할 때 이 간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짜로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체험적인 십자가의 죽음

  갈라디아서 2:20을 줄줄 인용하는 것과 우리 생활을 통해 그 내용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이 답을 위해서 성경을 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살펴보자. 십자가를 대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반대하고 돌아서지 아니하였다. 그분의 행위는 수동적이 아니었다. 그분은 부끄러워하지도 아니하고, 안색을 부싯돌같이 굳게하였다(사 50:7).
  십자가에 가기 전에 그분이 흘린 땀은 마치 핏방울 같았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힘을 당하면, 우리는 그분이 겟세마네에서 체험한 고민과 슬픔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입맞춤으로서 배반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배반당함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맹세하고 주를 세 번이나 부인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한다면 부인당함이 어떤가를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분을 조롱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걷는다면 조롱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많은 거짓증인이 그분을 고소했다. 우리가 완전히 그분과 합일된 성도라면 거짓고발이 어떤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아무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말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나아갈 때 많은 여자들이 소리내어 통곡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아 보시고 말씀하셨다. "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우리가 자기연민(self pity)의 죄에 빠지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게 된다.
  저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그분은 기도했다. "아버지
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 여러분이나 나나 쓰라리고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생길 때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게 된다.
  십자가에는 두 팔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양면이 또 있다. 우리가 갈보리에 나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을 가운데로 하는 세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 뒷면을 바라볼 때,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보게 되나? 당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의 뒷면 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당신이 십자가의 뒷면을 진정 보게 되고 또 당신이 당신 자신과 함께 당신의 자만심과 자아교만 또는 자아만족등이 그 십자가에 매어 달려 죽은 것을 보게 될 때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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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머 던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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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PARE NOW FOR THE SECOND COMING OF THE LORD JESUS CHRIST
By
Homer Duncan

First published in the English language in
1969 by Missionary Crusader, Lubbock, Tx, U.S.A.
1970 / Korean by Word of Life Press,
Seoul, Korea, All rights reserved.
Translated and published by permission.
Printed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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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장ː육신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