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6. 23. 22:59

" 육신 - 내적인 원수 "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오직 한 가지 성품밖에 없었다. 이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아직도 옛 성품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의 새로운 성품 곧 신성을 가지게 됐다(벧후 1:4). 이 두 성품은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며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들은 서로 반목하여서 너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느니라"(갈 5:17).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옛 성품과 새 성품의 투쟁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새 성품은 선을 행하고자 하나 옛 성품이 이를 거절한다. 새 성품은 악한 행위와 옛 성품의 나쁜 습관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지는 못한다.
  새 성품은 옳은 것을 행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힘이 모자란다. 바울은 자기의 옛 성품에서 전혀 좋은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안에 있는 이 두 가지 성품의 투쟁은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울부짖게 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롬 7:24). 우리가 육신을 극복하려면 먼저 육신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신앙적 의미에서 말하는 육신이란 우리의 뼈를 둘러싸고 있는 살덩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의 육신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육신이 나쁜 것이라면 우리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더욱 더 나빠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될 것이다. 신앙적 의미에서 육신이란 우리 안에 있는 사탄의 지배를 받는 혼의 일부 영역을 말한다. 이것은 아담이 죄에 빠졌을 때 들어온 죄의 속성이다. 육신은 타고난 우리들의 속성이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영역을 통해서다.

  육신의 표

  육신은 항상 악하다. 그것은 속되고 부패하고 타락하고 더러우며 연약하다. 성경에서는 육신의 소욕
(desires)을 열거하고 있다. 육신의 정욕과 육신의 죄와 육신의 일들이 성경에 명백히 밝혀져 있다. "이제 육신의 일들은 분명히 나타나나니 곧 간음과 음행과 더러운 것과 음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질투와 분노와 투쟁과 분열과 이단들과 시기와 살인과 술취함과 흥청거림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미리 말하노니 그런 짓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갈 5:19-21).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나니(롬 7:18), 육은 전혀 무익하니(요 6:63), 우리는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롬 8:4), 또한 육신을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빌 3:3-4).
  육신의 이와 같은 악한 점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기꺼이 인정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육신의 간교한 계책에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사탄은 간교한지라(창 3:1), 우리를 사탄의 영역인 육신을 통해 갖은 계략과 못된 유혹으로 항상 꾀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의지
(self-will) - 죄의 최종의 본질 - 는 육신의 주된 특성이다. 자아(self)는 간사하고 약삭빠른 수단으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작한다. 우리 중 대부분이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때에는 아주 훌륭해 보인다. 이 자기의지가 나타나는 때는 다른 사람이 우리 길을 가로막을 때이다. 옛 습성이 어릴 때에는 쉽사리 나타난다지만, 많은 금지 사항을 알고 있는 성인도 곧 잘 어린애다운 불장난을 하는 수가 있다.
  육신은 이기주의
(self-seeking, 자아추구)이다. 주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오셨다(마 20:28). 육신은 다른 것을 섬기는 대신 섬김받기를 항상 요구한다. 주는 대신 육신은 항상 무엇인지 얻으려 추구한다. 그러면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
  종교적인 활동? 그것은 육신이 좋아하는 겉옷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하려고 혈안이 된다. 남에게 보이는 것을 많이 하고자 한다(마 23:5). 육신은 자신의 경건함을 나타내려 한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존경받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타인이 선생 또는 박사님하며 불러 주기를 바란다(마 23:7). 그것은 자기의 업적, 훈장, 공적, 칭호, 메달, 학위 등을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과거의 공훈을 재론하기 좋아한다.
  육신은 긴 공중기도
(long public prayer)를 좋아한다(마 23:14). 몇년 전에 내가 선교사 집회에 참석했을 때다. 나는 항상 같은 형제가 매일같이 일어서서 큰 소리로 아름다운 어귀를 나열하며 긴 기도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 첫날에는 매우 아름답게 들렸다. 그러나 매일매일 들어감에 따라 나는 이상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한테 기도하는 것인가?"
  육신은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굉장한 법석을 떨어 댄다(마 23:23-24).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모른 체한다. 비록 자기 자신의 경건한 행위를 자화자찬할지라도 그것은 쓰라림과 비판과 시기로 가득한 것이다(마 23:27-28).
  육신은 믿기 전에 표적과 이적을 먼저 찾는다(고전 1:22). 너무나 흔히 스스로 영적임을 자부하나 실제로는 속되다. 이 구절은 또한 우리에게 육신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기 좋아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요,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것이니라. 이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 그러나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그 다음은 화평하며, 친절하고, 양순하며, 자비와 선한 열매들로 가득하고, 편견이 없고, 위선이 없나니"(약 3:15-17).
  육신의 또 하나의 표는 분쟁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에서,
"너희는 여전히 육신적인 사람이라.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적이 아니며 사람을 따라 행하는 자가 아니리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한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폴로에게 속한다.' 하니 너희가 육신적이 아니냐?"(고전 3:3-4)한 사실을 보라.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육신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육신은 사랑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그러나 육신은 지독히 성급하고 인내심이 없다. "사랑은 친절하며," 그러나 육신은 거칠고 딱딱하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그러나 육신은 시기로 가득하다. 육신은 어떤 사람이 칭찬받거나 존경을 받는 꼴을 보면 안달을 떤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그러나 자랑하고 뽐내며 으스대는 것은 육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사랑은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그러나 육신은 거만으로 가득하다. 비극은 이것이니 육신은 타인이 쉽사리 보는 단점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몇년 전에 나는 한 형제가 이끄는 전도회에 참석한 일이 있다. 그는 일주일 내내 자기의 전도가 이룬 공로의 자랑으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에츠라 형제, 당신은 성경이 겸손에 관해 많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그의 대답은 나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아, 여보게 던컨 형제, 모든 사람이 공인하는 바 나는 이 마을에서 가장 겸허한 전도사라네."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그러나 자아는 항상 이런 말에는 상을 찡그리게 된다. 모든 교회 목사는 경험을 통해 얘기한다. "스스로 가장 영적으로 최고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쉽게 넘어지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그러나 육신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감히 그렇게 무례하게 나를 대할 수 있냐 말야! 나는 내 스스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 라고.

  아말렉, 육신의 상징

 「에서」의 아들,「엘리파스」의 아들,「아말렉」은 육신의 상징이다(갈 4:29).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아말렉」이 와서 그들과 싸웠다.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올렸을 때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기고 그의 손이 내려지면 아말렉이 이겼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을 이기려면 항상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투가 끝장에 이르렀을 때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의 기억을 완전히 없앨 것임이라" 하셨다. 주께서 맹세하시기를,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리라"(출 17:1-16)고 하셨다. 이 아말렉 족속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계속적인 원수다. 육신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은 기억하시고 어떤 것은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렘 31:34).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생활의 종말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아말렉이 길에서 너에게 행했던 것을 기억하라. 네가 피곤해서 지쳤을 때, 어떻게 그가 길에서 너를 만나, 네 뒤에 처진 연약한 자들을 맨 뒤쪽에서 쳤는지를 기억하라.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께서 차지하라고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너의 하나님께서 네 주위의 원수들로부터 벗어나게 하사 네게 안식을 주실 때, 너는 아말렉의 기억을 하늘 아래로부터 완전히 지워 버릴지니, 너는 그것을 잊지 말지니라"(신 25:17-19)고 하셨다.
  이 구절들을 통해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사탄은 우리가 연약할 때 육신을 통해서 공격한다는 것이다. 아말렉은 결코 정면 공격은 하지 않았다. 그는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다.
  아마 이스라엘 자손은 이것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400년 후에 하나님은 왕 사울에게 말하였다.
"나는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즉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올라올 때, 그가 길에서 매복하던 일을 기억하노라. 이제 가서 아말렉을 치되,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완전히 멸하여 그들을 남겨 두지 말지니, 남자와 여자, 아기와 젖먹이, 소와 양, 낙타와 나귀를 다 죽이라"(삼상 15:2-3). 사울왕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아 아말렉 군에 항거하며 싸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청종치 않았다. 그들은 사악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모두 전멸시켰으나 아각을 사로잡고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께 옳은 행위가 못되어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의 위치에서 내려 놓으셨다. "이는 거역함은 마법하는 죄와 같고 완고함은 행악과 우상 숭배와 같음이니이다. 왕이 의 말씀을 거역하였기에, 주께서도 왕을 거절하여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3).
  이 구절들을 통해서 우리는 또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육신을 전멸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럴 듯하게 보이는 육신의 일까지도 완전히 섬멸시켜야 한다.
  아각이 사무엘 앞으로 끌려 나왔을 때, 그는 말했다.
"진실로 사망의 쓰라림은 지나갔도다"(삼상 15:32). 그러나 사무엘은 말했다. "네 칼이 여인들로 자식이 없게 하였듯이 네 어미도 여인들 중에서 자식이 없게 되리라"(삼상 15:33). 사무엘은 길갈에서 주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갰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리라"(출 17:16). 우리는 결코 육신과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심프슨」박사는 여호수아 12장에 열거된 31명의 왕들을 각각 달리 이름지어 불렀다. 그들 중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면, "자기의지
(self -will), 방종(self-indulgence), 이기주의(self-seeking), 자기만족(self-complacency), 자기영광(self-glorying), 자기신뢰(self-confidence),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 자존심(self-importance), 자기존중(self-depreciation), 자기변명(self-vindication)" 등이다. 이 모든 것들은 약손된 땅을 소유하기 전에 완전히 죽어야만 한다. 자아가 살아나면 교만으로 채워지며 실패하면 자기연민(self-pity)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기보다 좀 더 승하면, 자아는 꼬집고 흠잡는다. "육신의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육신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참된 성도라면 자아 또는 육신은 우리 생활에서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육신의 적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어떤 이는 "자기억제
(self-control, 자아억제)"를 내세운다. 이것은 용수철 장치를 한 상자 속의 권투장갑과 같다. 우리가 상자 속에 권투장갑을 감추어 둘 때는 아무렇지 않으나 열리는 순간 장갑이 튀어 나오면서 용수철의 힘으로 불상사를 가져오는 것 같이 자기억제로 꽉 눌러 놓았던 모든 육신의 더러운 것들이 최악의 경우에 한꺼번에 뛰쳐 나오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아는 완전히 근절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나"(요일 1:8) 라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아를 갱신시키고 이를 교육시키려고 애쓴다. 이것은 마치 한 여인이 가진 애완용 돼지와 같다 하겠다. 그녀의 친구들은 대부분 애완용 강아지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그들과 색다르고 싶어서 스스로 조그마한 돼지를 택했다. 그녀는 매일 돼지의 핑크빛 살갗이 빛나도록 씻겼다. 꼬리와 발톱을 닦아주고 향수까지 뿌렸다.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혀준다. 목주위에 황금 장식을 달아준다. 그녀는 이 돼지가 다른 친구들이 가진 애완용 강아지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갖은 애를 쓰며 길을 들이려고 나쁜 습관을 고쳐주려 한다. 어느 날 그녀가 그 돼지를 안고 비오는 길을 걸어 나갔다. 길바닥은 온통 뒤범벅이 되기 시작했다. 이 조그만 돼지는 냄새를 맡고서 달아나려고 발버둥쳤다. 얼마안가서 드디어 그녀의 팔을 빠져 나갔다. 더러운 구덩이를 찾아 주둥이를 파묻었다. 즉시 옛 돼지 그대로의 제 본성을 드러냈다.
  얼마나 갔는가? 그의 외부적인 모양은 깨끗이 씻기워졌고 향수까지 뿌렸지만은 그의 옛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진흙과 웅덩이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런 예를 든다는 것은 실례가 될지 모르나 사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교육, 문화, 청순, 고결의 겉옷을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옛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보라, 영화나 텔레비젼의 누드쇼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보여주며 찍어내는 것이 아닌가? 물론 교양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럴 듯한 미끼로 고상한 프로그램을 끼워 넣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다. 죄의 속성을 그대로 지닌 것이다.
  육신은 비천하고 사악하며 더러운 모습으로 등장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련되고 문화화되며, 경건하며, 보기에 근사하며 심지어는 성스럽고 거룩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육은 육이다. 사람들은 자기개혁
(self-reformation, 자아개혁)을 가르친다. 그러나 현실은 가르친다. 자기개혁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손댈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한 죄인이 제아무리 생활을 통제, 자제해서 모든 사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나쁜 버릇을 그만 두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전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개혁은 자기의(自己義, self-righteousness)를 낳고 자기의 수많은 불의의 길을 마련하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
  자기개혁의 무가치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더러운 영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물 없는 곳으로 두루 다니면서 쉴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자,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돌아와 보니, 그 집이 비어 있고, 소제되고, 단장되었더라. 그러자 그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일곱 영을 데리고 들어가 거기서 사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 보다 더 악화되었더라. 이 악한 세대도 그러하리라."(마 12: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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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머 던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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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PARE NOW FOR THE SECOND COMING OF THE LORD JESUS CHRIST
By
Homer Duncan

First published in the English language in
1969 by Missionary Crusader, Lubbock, Tx, U.S.A.
1970 / Korean by Word of Life Press,
Seoul, Korea, All rights reserved.
Translated and published by permission.
Printed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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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장ː"육신" ─ 내적인 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