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6. 23. 23:48

한국 언론의 여명 연 서재필의 독립신문


  <26> 서재필과 독립신문     
 
◇서재필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해 조선백성을 계몽하고, 조선을 바로 세우려 했다.

3년 반의 씨뿌림이 한국신문 발전 씨앗돼
안정된 생활접고 조국에 사랑바친 선각자

 

“하나님, 바른 정론지를 통해 우리 국민들을 무지로부터 깨워주시고, 조선을 바로 세워주시옵소서.”
1896년 1월, 11년간의 미국망명 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서재필 박사의 마음에는 미국에서 그렇게 그리던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당시 조선은 2년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속에서 이 땅의 이권을 노린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화하여 1895년 10월에는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살해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집권층은 외세에 의존하여 조선의 자주권을 지킬 수 있는 방책을 찾느라 골몰했고 백성들은 국내외 정세에는 무지한 채 다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재필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문을 발간해 국민을 계몽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가 10년 전에 일으켰던 갑신정변이 백성들의 몰이해로 실패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정부에서 발행하는 한문으로 된 관보만 관리들에게 배부되고 있었고 일반 국민들에게는 신문이 전혀 없을 때였다. 다만 아펜젤러·올링거 목사가 1889년 배재학당 내에 인쇄소를 설치해 ‘교회(1889.5)’, ‘Korean Repository(1892)’ 등의 격주간지와 월간지를 발간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서재필은 이들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며 1896년 3월부터 국고보조금을 받아 일본에서 인쇄기를 들여오고 직접 인쇄기를 돌리며 사람들을 훈련시켜 1896년 4월 7일 한글판 3페이지와 영문판 1페이지로 된 독립신문 창간호를 발행했다.
창간호 논설에서 서재필은 “이 신문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고 공평하게 대할 것이며, 백성과 정부 사이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사실적인 정보의 원천 역할을 할 것이며, 신문값을 최소화하고, 한자 대신 한글을 사용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구독할 수 있도록 하고, 영문판을 첨부해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보도한다”는 요지의 창간 취지를 밝혔다.

논설·공고·국내외 뉴스 등으로 구성된 독립신문의 탄생은 세상의 이목을 끌어 창간호 200부는 당일 모두 매진되었다. ‘신문’의 ‘신’자도 들어보지 못했던 조선 사람들에게 독립신문은 큰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중국과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던 일반 대중에게 서양 국가들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소식은 신기한 것이었다. 더구나 천부인권(天賦人權), 국민과 정부의 상호 의무 등에 관한 서재필의 논설은 일반 대중을 오랜 잠에서 깨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런 뜨거운 반응 속에서 독립신문은 1897년 1월, 8페이지로 확대됐고 언문판과 영문판으로 분리됐으며 발행부수도 3,000부로 늘었다. 
그러나 독립신문으로 조선백성들을 계몽하는 데는 서재필의 더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신문에 광고가 실렸지만 대부분 무료광고였기 때문에 독립신문은 주로 구독료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부당 1전(0.5센트), 년간 구독료 3원(1달러50센트)밖에 안되었던 상태에서 구독료 수입만으로는 운영이 안돼 매월 약 150원(76달러)에 달하는 적자를 서재필 자신이 충당해야 했다.

게다가 당시 신문사 사람들은 가두에서 신문을 파는 것이 체면을 깎고 거지같다고 느껴 신문을 팔지 못했다. 이에 서재필은 이들을 종로 네거리로 데리고 나가 신문 한부를 뽑아 치켜 쥐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독립신문이요! 누구에게나 필요한 신문이요! 읽기 쉽게 한글로 된 신문이요! 한 부 사서 조선과 세계정세를 알아보시오. 1전이요!”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자 서재필은 “이 신문은 시민의무는 물론 여러분들의 권리를 알게 할 것이고 생활을 개선시켜 풍부하게 할 것입니다”고 외쳤다. 그러자 신문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따라 나섰던 신문사 사람들에게 “이 신문이 읽을 가치가 있고, 합당하다고 믿는다면 신문 파는 것을 창피하다고 여겨서는 안되오. 우선 사는 사람에게 좋은 일이요. 당신들도 이것을 팔아서 정직한 생활을 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요. 어서 나가 팔아보시오”라고 권면했다.
독립신문은 조선 백성들에게 자주독립사상 의식을 고취했고 신분제, 노예제, 남녀차별 폐지를 주장하여 평등사상을 일깨웠다. 또 한글 사용을 통해 국민대다수에게 한글문화를 보급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조선을 침탈하려는 열강과 당시 수구파의 폭정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런 개혁성향적인 비판은 당시 조선 정권을 잡던 친로 수구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폐간되었다.

독립신문은 또 한국 신문 창간의 씨앗이 되었다. 독립신문 발간을 본받아 1898년 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 등이 잇따라 간행되었고 독립신문이 폐간된 후에도 대한매일신보(1904)·만세보(1906)·대한민보(1909)·조선일보(1920)·동아일보(1920) 등이 이어져 나왔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조선백성을 계몽해 갑오·을미개혁이라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생활 속으로 내면화시켰고 그 뒤 한국인이 발행한 민족지 출현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미국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조선 땅에 실현하기 위해 안정되고 평안한 생활을 희생하고 가시밭길과 같은 조국행을 택한 서재필 박사의 겨레 사랑과 간절한 기도가 있었고, 그 기도를 응답하신 신실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선교사의 문서선교로 시작된 한국의 인쇄출판업

1880년대 조선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선교사들은 병원·학교 설립 뿐 아니라 인쇄소 설치와 출판사업으로 조선인의 정신과 영혼을 깨웠다.
1885년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Appenzeller) 목사는 조선인들의 계몽을 위해 중국 상해에서 문서선교사업을 하던 영국인 올링거 목사를 초빙, 배재학당 내에 인쇄시설을 갖춘 출판사를 운영하기로 했다. 1889년 1월 4일 중국에서 32면을 찍는 인쇄기를 구입하고 일본에서 국문과 영문 연활자주조기를 도입,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현대식 인쇄시설을 설치한 출판사를 운영하기로 했다. 이 출판사의 이름은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Trilingual Press)였는데 당시 정부 박문국 인쇄시설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인쇄소였다.

그 뒤 1893년 헐버트(Hulbert) 선교사가 올링거 목사 후임으로 부임해 중국 상해에서 자모를 대량구입, 삼문출판사의 인쇄시설을 확충하는 한편 1896년에는 인쇄소에 별도의 제본소도 설치했다. 그는 1895년 5월에 감리교서점을 차려 출판사에서 발간된 서적들을 전국적으로 보급시키는 데도 힘을 썼다. 당시 감리교 선교사로 들어온 벙커(Bunker), 콥(Cope), 엠벌리(Emberly)도 이 인쇄소의 일을 도왔다. 1900년에는 미국에서 모금한 5,000달러로 제본기·활자 등을 구입해 인쇄소를 확장하며 그 명칭을 삼문출판사에서 감리교출판사로 바꿨다.

이곳에서 인쇄발행된 신문·잡지는 한국 최초의 잡지인 아펜젤라 목사의 격주간지 ‘교회(1889. 5)’, 올링거 목사의 월간지 ‘The Korean Repository(1892)’, 서재필 박사의 ‘독립신문(1896. 4)’, 아펜젤러 목사 주간지 ‘죠선 그리스도인 회보(1897. 2) ’, 언더우드(Underwood) 목사의 주간지 ‘그리스도 신문(1897. 4)’, 배재 학생회의 ‘협성회보(1898. 1)’, 윤치호 선생의 ‘경성신문’ 등이 있다.  특히 외국선교사들이 제작한 신문·잡지들은 당시 국내외 소식과 성경연구, 논설 등의 내용을 게재하여 조선인들에게 다양한 뉴스와 의견을 전달했다.

백낙준 박사는 그의 저서 ‘한국개신교사’에서 “배재학당 내에 있던 삼문출판사는 한국 유일의 선교기관 인쇄소로 수도 내의 거의 모든 인쇄물을 독차지했고 특히 신약성경과 기독교 서적, 독립신문 등을 인쇄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한국 개화기에 외국 선교사들이 시작한 인쇄사업과 신문·잡지 발행은 당시 조선인을 계몽해 황성신문·제국신문·조선일보·동아일보 등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잡지를 출현시켰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서재필의 애통과 번민의 생애

서재필 박사(1866~1951)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해 최연소로 과거에 장원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당시는 외국인을 오랑캐로 인식하고 중국의 요순시대만을 이상사회로 생각하던 때였다. 이런 폐쇄적인 사상이 나라 발전을 막는다고 생각한 서재필은 김옥균·박영효 등 깨어있는 지식인(개화파)들과 교류했다. 

1884년 이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문벌폐지 등 혁신정강 14개조를 추진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혁명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홍영식 등은 청나라 군대에 살해당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서재필은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당시 부호였던 홀랜백(HollenBach)의 도움으로 펜실베니아 윌크스 바레(Wilkes Barre)의 힐만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amy, 중등 학교)에 입학해 신문명을 배웠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하여 하나님을 믿게 됐다.

졸업후 서재필은 홀랜백으로부터 자신이 이사로 있는 라파옛(Lafayette)대학을 거쳐 한국선교사로 간다면 모든 학비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고자 마음먹고 이를 거절했다.
서재필은 스콧 교장의 도움으로 스미소니안(Smithsonian) 박물관에 취직해 일본·중국에서 온 책들의 번역과 정리를 시작했다. 이후 1888년 1월부터 그는 미국 정부 의무총감실 소속 도서관에서 의학서적 번역을 하며 의학도의 길을 가기로 결심해 이듬해 콜롬비아대 의학부에 입학한 후 1892년 한국인 최초로 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1894년 6월 그는  미국 철도우편의 창시자인 암스트롱(George Amstrong)의 딸 뮤리엘(Muriel)과 결혼해 행복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들의 결혼은 암스트롱의 명성으로 인해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화두거리였다.
서재필은 이런 행복한 미국생활에서도 늘 마음 한구석에 조국에 대한 사랑과 번민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5년 박영효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 서재필을 찾아와 중국, 러시아, 일본의 침략야욕과 국내 경제의 피폐함을 설명해줬다. 그는 미국인들이 기독교를 바탕으로 누리는 자유와 평화를 한국인들도 누리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895년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미국에서 신문의 영향력과 중요성을 체험한 그는 귀국후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신문제작에 뛰어들었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대중을 교육하고 교육받은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조선의 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고 사회 공의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위생과 청결 등의 계몽운동과 신앙을 중심으로 미신타파에 힘썼으며 사법제도와 관리임용 등 정부의 부패 등에 대한 개혁을 주장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그는 1896년 7월 2일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단체인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이상재·이승만·윤치호 등이 참여한 독립협회는 정부의 외세 의존정책에 반대하며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했다.
초기에 독립협회는 토론회·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에 힘써 많은 젊은이들을 모았으며 나중에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갖고 실천에 옮겼다. 서재필은 1896년 7월 4일자 논설에서 독립협회의 활동과 관련 “조선이 몇 해 청국 속국으로 있다가 하나님 덕에 독립이 되었으니 이를 영구히 알리고… 독립문을 지어 그 뜻을 기념하자…”라고 썼다. 이 글이 실제로 실현되어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1897년 11월 독립문을 세워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자 1898년 정부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서재필은 1898년 독립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도미한 후 1904년부터 인쇄업을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접한 그는 미국의 이브닝 레져러(The Evening Ledger)라는 잡지사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에 알렸다. 또 1925년에는 호놀룰루의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며 해외에서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