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피멍든 땅에 핀 꽃 ‘대한민국’
순교자
순교자의 피멍든 땅에 핀 꽃 ‘대한민국’
일본 신사참배 반대로 민족자긍심 일깨워
남북한 교회, 공산당에 항거해 민주주의 지켜
1886년 9월 3일,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두 번째 조선선교여행을 나선 토마스 목사는 조선군사에 잡혀 양각도 건너편 모래언덕으로 호송됐다.
당시 조선은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기독교를 사교(邪敎)로 금지했다. 국법에 따라 한 사람씩 칼로 목을 베었다. 토마스 목사 차례가 왔다. 이때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간수했던 성경책을 꺼내어 미소와 함께 조선 군인에게 받으라며 내밀었다. 그러면서 그는 하늘을 향해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R.J.토마스 목사는 이렇게 대동강에서 피를 흘렸다. 토마스 목사의 피는 그 후 이 땅에서 기독교진리를 위해 순교한 수 많은 피흘림의 시작인 동시에 순교자의 피와 기도에 의해 바뀌게 되는 이땅의 근대사의 서막을 알리는 피였다.
일제시대 3·1운동은 폭정과 전제(專制), 탈취와 압정 등 일제가 저지른 악에 대한 기독교인 중심의 항거였으며 민족자각운동이었다. 기독인들은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악의 세력은 멸망하고 하나님을 믿는 나라는 해방과 자주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을 3·1운동을 통해 선포했다.
그러나 일제는 제암리 교회, 강경, 강서 등에서 기독인들을 교회 안에 가두고 불을 질러 죽였다. 1919년 10월 장로교 총회 보고에 따르면 장로교회 한 교파에서만 체포된 사람이 3,804명, 사살 및 구타로 죽은 사람이 47명이었다. 그들의 흘린 피는 민족적 자각을 일깨웠고, 후에 광복의 기초가 됐다.
1930년대 초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국체신도(國體神道)를 부흥시켜 전쟁수행을 위한 애국심 고취와 전의(戰意) 동원의 한 방편으로 삼으려 했다. 서울에 조선신궁(神宮)을 세워놓고 각 면마다 신사(神社)를 짓게 하고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라고 믿고 반대했다. 일제는 신사는 종교적인 의미가 없고 국민들이 국가와 조상에 대한 존경과 성의를 표현하는 교육적·도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감리교회는 이런 일제의 주장을 글자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장로교회는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판단해서 가결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이 참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평양 산정현 교회 주기철 목사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 1계명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일사(一死)를 각오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다른 것으로는 우리 한국교회에 바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라는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했다. 이런 믿음은 당시 사람들에게 일본 억압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상이었으며, 나아가 해방의 밑거름이 됐다.
뒤이어 최봉석, 박관준, 박의흠, 이영한, 전치규 등 수많은 사람들이 당시 교회가 자의든 타의든 신사참배를 인정하는 수치와 변질위기의 길을 가고 있을 때,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그들은 우리들과 똑같이 약함과 슬픔과 두려움으로 떨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몸 밖에 드릴 것이 없어 몸 바친’ 신앙인들이었다. 이들의 수난과 순교는 신앙과 진리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 각성으로 이어져 조국광복을 앞당겼으며, 해방 후 한국교회의 양심이 되어 역사의 허물을 덮을 수 있었다.
해방 후 유물사관의 공산당의 등장은 이 땅의 기독인들에게 순교의 피를 요구하는 또 다른 시련이었다. 소련군의 주둔으로 공산화가 진행된 북한지역에서 교회탄압은 거셌다. 철저히 유물사관을 갖고 기독교를 탄압하는 공산당은 1946년 11월 3일 주일에 소위 인민위원선거를 실시해 교회를 처음으로 시험했다.
교회는 이 시험에 대해 “우리는 성수주일 원칙에 따라 선거참여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공산당원들은 교회당을 포위하고 혁명가를 부르며 위협적인 행동을 감행했으나 여기에 굽히는 교인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기독인들은 순교까지 각오하고 나섰다. 이 모습을 보게 된 공산당은 교회가 반역성을 드러냈다며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성도와 목사들을 투옥하고, 살상을 가했다.
이어 공산당은 장로교의 평양신학교, 감리교 성화신학교 등을 탄압했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 이성휘 박사(목사)는 공산당이 신학교를 당에 등록하라고 하자 “신학교는 하늘나라에 등록돼 있으니, 세상나라에 등록할 필요가 없다”며 공산당에 대항했다. 이로 인해 이성휘, 강문구, 김태복 등 대부분의 교수들은 투옥되어 6·25때 감옥에서 사살되어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그 외에도 수많은 북한 기독인들의 순교가 줄을 이었다. 1947년 평양신학교 김인준 교장이 소련군에 의해 순교했고, 이정심(1901~1947) 목사 역시 12월 8일 소련군의 고문으로 순교의 길에 올랐다. 그리고 김철훈 목사(1948), 이유택 목사(1949)등도 이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밟았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땅 전역에 걸쳐 공산당에 대항하며, 신앙의 순결을 지킨 순교자들의 피가 흘렀다.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 두 아들을 공산당에게 학살의 제물로 바쳤던 손양원 목사는 1950년 공산당에 체포돼 순교했다. 손 목사는 ‘주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쳐야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전해줬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밖에 양주삼, 송창근과 같은 기독인들은 납치되어 소식이 끊겼다. 자료에 의하면, 6·25사변을 통해 손실된 교회수가 장로교 152, 감리교 84, 성결교 27, 구세군이 4군데였고, 순교 납치된 기독인의 수는 250명에 이르나 알려지지 기독인까지 합치면 훨씬 많다. 가령 전라북도 옥구군 원당(元堂)교회에서는 75명 중 73명이 6·25전란 중 학살당했다.
6·25당시 북한교회의 참화는 더욱 심각했다. 예배보다 총살을 당한 황해도 재령·신천·안악·장연·풍천의 교인들, 함경도 감옥 뜰에서 학살당한 신도들, 기독인 4명씩 묶어 총살하고 이를 수장한 함흥 참변, 우물과 방공호 속에 기독인을 쓸어 넣은 함흥부근 광산의 참변, 평북 선천에서 자행된 천여 명 성도의 집단학살 등 기독교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사에 유례없는 부흥을 이룩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꽃피워 경제적으로 이만큼 살게 된 데에는 억압과 폭정 앞에 목숨을 내어 놓고 진리를 지킨 이들의 피 때문이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처럼 수많은 성도들은 진리를 사수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렸고, 그 희생의 토양에 핀 꽃이 오늘의 대한민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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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공산치하 북한기독인들
하나님의 뜻과 자유수호 위해 순교
기독교사회민주당 - 신의주학생의거 등 반공정신 밑거름
해방 후 북한의 기독인들은 공산세력에 맞서 하나님 뜻에 맞는 정치를 하고자 했다. 1945년 평북 신의주에서 윤하영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기독교사회민주당’은 기독교 정신을 이념으로 하여 정치 활동과 반소(反蘇) 활동을 폈다.
이 정당이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지당(支黨)을 조직, 당세 확장에 나서자 당황한 소련군이 탄압하기 시작했다. 1945년 11월 용암포에서 개최된 지당 조직대회 때 소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당은 대회장을 습격, 위원장 장원봉(張元鳳) 이하 간부 전원을 구타·타살했다. 당시 신의주에 있던 9개의 중등학교 학생들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수준높은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들이 공산당의 용암포 만행소식을 접하자, ‘공산당을 쳐부수자’라고 외치며 시위운동에 나섰다. 그래서 3,500여명의 학생들은 총궐기해 공산당과 소련군에 맨몸으로 대항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총부리에 맡긴 것이다. 그 결과 수백 명의 학생들이 죽고 부상을 당했는데 이 사건이 바로 `신의주반공학생의거’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룩하고자 한 기반으로 한 기독교사회민주당의 창당과 활동은 신의주학생의거를 촉발시켰고 신의주의거에서 학생들이 흘린 피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공산당과 싸워 흘린 피의 효시가 됐다.
한편 1945년 김화식(金化湜 1894~1947) 목사를 중심으로 김철훈, 김길수, 지형순, 이유택, 우상필 목사 등은 평양에서 민주정부수립을 목표로 ‘기독교자유당’이라는 새 정당 정강(政綱)을 작성했다. 이들은 곧 통일이 온다고 예상하고 통일 후 하나님 말씀 위에 민주주의 정부수립을 목표로 정당을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북한의 방해공작으로 발족은 지연됐다.
1947년 9월 UN총회에 ‘한국독립안’이 상정됐다. 이들은 이 때를 기회삼아 국제사회에 남북통일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11월 9일 평양에서 창당식을 가지려 했다.
그런데 창당 하루 전 기밀이 탐지돼 김화식 등 40명의 발기인이 체포·투옥돼 순교 또는 행방불명됐고 창당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결과 교회와 공산세력과의 갈등이 더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북한에는 10개 노회와 2천여 개의 교회, 30만 가량의 교인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연합하여 인민위원회를 향한 신앙탄압반대 성명서를 내는 등 공산정권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다.
그러나 억압과 핍박 속에서도 기도와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 북한 교인의 수는 지속적으로 늘어나 교회가 부흥됐다. 더욱 핍박이 심화되자 남한 또는 만주 등지로 흩어져 그 곳에서 기독교를 부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북한 기독인들이 흘린 피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한 기독인들의 소망을 대변하는 동시에 공산압제에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향후 희생제물이 되어야 할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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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엘리야 박관준 장로
일본국회서 누가 참 신(神)인가 대결 촉구
1939년 평북의 한 개척교회 장로였던 박관준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조선의 신앙탄압 중지를 항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일본국회에 잠입해 제국의회개최 중 ‘기독교탄압 종교법안 반대진정서’를 뿌려 일본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진정서에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임을 고백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은 ‘죄’라고 단언했다. 또 하나님을 믿는 나라는 축복을 받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벌을 받으므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기독인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 성경에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우상숭배자들과의 대결을 벌여 승리한 것처럼 ‘하나님과 일본의 신(神) 중 누가 참 신인지 시험해보자’고 해 대일본 신앙의 선전포고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박장로의 경고를 끝내 무시하고 그를 구속해 평양감옥에 수감했다. 박장로는 6년간 옥고를 치르다 1945년 1월 1일 70여 일의 금식기도로 빈사상태에 이르러 평양기독병원으로 옮겼으나, 3월 13일 순교했다.
순수신앙을 지키면서 신사참배에 반대한 박장로는 진정서를 통해 일본패망을 예언하여 일본사회에 전해줌으로써,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참 신앙인이었다.
기독교탄압 종교법안 반대진정서 내용
1. 여호와는 유일하신 참 신이시다
2.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며, 그의 섭리 아래 인류의 역사가 전개된다.
3. 여호와 하나님을 신봉하는 나라는 그의 축복을 받아 번성하겠고, 그를 섬기지 않는 나라는 형벌을 받아 망할 것이다.
4. 한국 신도들에게 일본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다.
5. 그러므로 한국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라.
6. 무고히 구속돼 있는 한국 신도들을 곧 석방하라.
7. 만일 당신이 신의 뜻을 순종치 않으면, 신은 불원(不遠)에 일본을 멸망시킬 것이다.
8. 당신이 만일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 참 신임을 믿기 어렵거든 하나님이 참 신이신가 혹은 천조대신(天照大神: 일본 최고의 신)이 참 신인가 시험해보자. 그 시험의 방법은 나무 백단을 따로따로 쌓아놓고 그 위에 나와 신사의 제사장을 올려 앉히고 불을 질러서 신사 제사장은 불타고 나는 타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알게 될 것이겠고, 그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일본의 신으로 섬겨야 할 것이다.
'(Ⅱ) 말씀이 있는 쉼터 > ㆍ글모음·예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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