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감정은 영적 조명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불빛없는 단순한 뜨거움이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전에 느꼈던 것보다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이해"하기 때문에 "느끼는"것이다. 그는 전보다 더 분명하고 더 정확한 견해를 가지게 되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새롭게 이해했거나 아니면 과거에 알았었지만 잊었던 지식들을 다시 회복할 수도 있다.
"내가 이것을 기도하노니 너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에 있어서 더욱더 풍성하게 되어"(빌 1:9).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 안에서 새롭게 된 새 사람을 입었으니"(골 3:10).
"교리적인" 지식과 "영적인" 지식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교리적인 지식은 지적 능력만 있어도 되지만, 영적 지식은 기독교 교리가 지니고 있는 그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마음의 감각이 개입되어야 한다. 영적 지식은 항상 지식과 마음이 같이 개입하게 된다. 우리는 성경의 교리가 지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가슴으로 그 의미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지적으로는 교리에 대해서 아주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교리가 지니고 있는 거룩한 아름다움을 전혀 맛보지 못할 수도 있다. 지적으로, 즉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영적으로, 즉 가슴으로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교리에 대한 단순한 지적 이해는 마치 어떤 사람이 꿀을 보고 만져 보기는 했지만 맛을 보지는 못한 것과 같다. 영적 지식은 꿀의 달콤함을 직접 맛본 자와 같다. 단지 꿀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는 한 사람이 어찌 그 꿀을 맛본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단지 성경 말씀의 비유라든가 모형 또는 은유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성경을 영적으로 잘 이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혼에 비추는 한 줄기의 영적 조명 없이도 이런 것들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언의 은사가 있어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성경의 "영적 의미"는 상징적인 성경 구절들의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 성경 진리의 신적인 달콤함에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우리 마음속에 보여 주셨다면 그것은 영적 지식이 아니다. 이런 지식은 영적 지식이 아니라 여전히 교리적인 지식이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역사들에 대한 사실들이 모두 교리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사실들도 교리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직접 계시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단순한 교리적 지식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룩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즉각적인 계시들은 우리의 지식을 영적인 것으로 만들 수가 없다. 영적 이해에 관해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또 한 가지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성경 구절들 -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과 그들의 행동이 묘사된 구절들 - 을 그들의 머리 속에 갑자기 떠오르게 함으로 그분의 뜻을 계시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극복해야 할지도 모르는 외국이나 타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하자. 갑자기 그의 머리 속에 창세기 46:4이 떠오르면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갈 것이며 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리라.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이 말씀은 야곱과 그의 행동에 관련된 기록이지만, 이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집트"는 지금 자신이 가려고 하고 있는 타국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그 타국에 안전하게 데리고 갔다가 다시 본국으로 데려다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믿는다. 그 사람은 이 구절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영적 이해"로 믿거나 성령이 자기를 인도하셨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 상황에 영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영적 이해란 그 성경 말씀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지 그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경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면 그것이 새 성경을 만들어 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추가하는 행위요, 이런 행위는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행위다!(잠 30:6) 성경의 참 영적 의미는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성경이 처음 쓰여졌을 때 부여된 의미이다. 만약 영안이 열려 있다면 이 원래의 의미를 누구든지 보게 될 것이다. 이런 경험들이 생생한 감정을 유발시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의 뜻을 자신에게 계시하신다고 믿을 때 사람들은 굉장한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즉 이 경험들은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거룩하심을 음미했거나 또는 느낀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름다운 거룩하심을 보고 느낀 것에서 비롯된 것들이어야만 영적 감정들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사람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또는 머리에 갑자기 떠오른 감정이나 어떤 특정한 단어라면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들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짓 종교들의 대부분이 그들을 흥분시키는 이런 경험들과 거짓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불행하게도 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험들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비성경적인 것으로서 특히 지적 수준이 낮거나 부족한 사람들에게 더 심하게 나타난다. 불행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감정이나 환상, 황홀감을 기독교의 전부라고 믿는다. 그래서 사탄은 빛의 사자로 모양을 바꾸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진리의 종교를 타락시킨다. 교회 지도자들은 항상 이런 속임수에 대한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부흥의 시기에는 특히 그러하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주장해 온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오해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나는 단지 믿음의 감정들이 상상 속의 생각들과 더불어 생겨난 것이라고 해서 그 감정이 영적 감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상상 속의 생각이나 그 비슷한 유형의 아이디어 없이는 깊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감정들이 영적 지식이 아닌 상상 속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감정은 영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영적 감정에서 상상 속의 생각들은 나올 수 있으나, 상상 속의 생각에서 영적 진리에 근거한 영적 감정이 유발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기 바란다. 영적 감정은 오로지 아름다운 거룩함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분별력인 영적 지식에서만 나온다. 만약 상상 속의 생각들이 진정한 영적 감정들과 같이 나타난다면 이것들은 우연에 의한 부수적인 결과일 뿐이다.
────────────────────────── 조나단 에드워드 /『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 』ː 제3부... 중에서.... ──────────────────────────
━━━━━━━━━━━━━━━━━━━━━━━━━━━━━━━━ THE EXPERIENCE THAT COUNTS! By Jonathan Edw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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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3 부ː진정한 영적 감정을 본받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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